올해도 예외가 아닌 모양이다. 헌법에 명시돼 있는 예산 통과시한은 이미 지난지 오래됐다. 17대에 이어 18대 국회도 입법건수 측면에서 과거의 통법부 시절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겠다던 다짐은 예산 심의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참으로 안타까운 모습이다. 중국의 시진핑 부주석 면전에서 꼭 이러한 모습을 보여야만 하는 것인지 여야를 막론하고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하지 않을까.
여야는 작년 이맘때 한미FTA(자유무역협정) 비준동의안을 국회 외교통상통일위원회에 상정하면서 후대에 두고두고 기억될만한 폭력사태를 빚었다. 한나라당이 비준동의안을 단독 상정하기 위해 회의장을 점거하고 국회 경위와 각종 집기류로 출입문을 봉쇄하자 민주당이 해머, 노루발, 전기톱을 동원해 문을 부숴 버리면서 양측이 격렬하게 충돌했다. 욕설과 몸싸움, 소화기 분말과 물세례까지 동원된 이성잃은 싸움은 지금까지 '폭력국회'라는 오명 속에 국민의 뇌리에 선명하게 남아 있다. 한해가 지났지만 올해도 폭력은 달라진게 없다.
4대강 사업 예산을 놓고 양보없이 대결해 온 여야는 국회 예결위 회의장에서 일촉즉발의 대치를 벌이며 파행을 재현하고 있다. 민주당이 한나라당 단독의 예결위 계수조정소위 구성을 저지하기 위해 회의장에 진입, 의장석을 점거하면서 시작된 충돌로서 이미 한차례 몸싸움도 벌였다. 여기에 여야는 올해 대립을 계속하다 정기국회 종료일을 이틀 남기고서야 가까스로 내년도 예산안 심의를 본격화하는 무능까지 드러냈다.
한나라당은 새해 예산안의 연내 처리를 위한 비상체제 가동을 검토키로 했다고 한다. 한나라당 예산결산특위 위원 29명은 여야간 협상이 최종 결렬될 경우 국회 예결위 계수조정소위 구성과 관계없이 실질적 예산심사를 진행키로 했다. 꼭 이렇게 반쪽의 모습으로 국가의 살림살이를 심의해야 하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우리는 국회의 예산심의 기능을 보완하기 위해 2003년 10월 국회예산정책처를 출범시켰다. 초대 처장이 면직되는 불상사도 있었지만 이러한 어려움을 극복하고 이제는 제법 번듯한 분석자료를 상당수 내놓고 있다. 독자적인 경제전망, 예산안 분석, 세제개편 분석에서부터 주요 재정사업의 평가와 법안비용추계에 이르기까지 그 범위가 계속 넓어지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분석보고서들이 제대로 활용되는가는 또다른 문제라고 본다. 국회가 저렇게 극한 대립으로 치닫게 되면 정작 예산안의 심의가 심층적으로 이뤄질 수 있는 기회는 무척 희소해지며 그러면 그럴수록 전문적인 예산분석의 효용도는 떨어질 수밖에 없다.
우리 국민은 참으로 불행한 처지에 놓여 있다. 내년에 한번 만져보지도 못하고 192조원의 세금을 국가에 내야 하는 정부살림에 대해 도대체 우리의 대리인들인 국회의원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하나 하나 주요 사업을 따져보고 그 타당성에 대해 심층적인 전문가 토론과 청문을 거쳐 예산안을 심의하는 모습을 우리는 보고 싶은 것이다. 봉쇄와 부수기를 위해 밤을 지새는 것이 아니라 예산안의 파급효과에 대해 이모저모를 점검하고 따지기 위해 도서관과 의원실 등에서 밤을 지새는 의원과 보좌관들의 모습을 보고 싶다. 예결위 계수조정소위원회에서 대략적으로 검토하고 정치적인 사업거래를 끼워 넣고는 연말에 가까스로 예산안을 통과시키는 관행에 이제는 화가 나기까지 한다. 국가재정법과 국가회계법의 취지대로 재정건전성과 투명성을 제고하고 중기적인 재정계획을 만들어 지속 가능한 재정을 꾸려가려면 국회의 역할은 더욱 강화돼야 한다. 그러나 현재와 같은 폭력적인 국회, 투쟁일변도의 국회에서는 오히려 국가 운영의 발목만을 잡게 되지는 않을까 심히 우려되는 바이다.
선진화는 다름 아닌 정신자본의 성숙이다. 국회의원 한사람 한사람이 모두 존경스런 분들이지만 정작 당리당략에 치우쳐 법치주의를 지키는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는 것은 미래 후손들에게도 엄청난 악영향을 미친다. 이들이 현재의 국회 모습을 보고 무엇을 배우란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