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8월말∼9월초가 되면 세제개편안이 발표된다. 새로운 행정부가 출범하는 첫해에는 조세제도가 구조적으로 새롭게 탈바꿈하는 경우가 많다. 새 정부의 성향에 따라 과세철학이 바뀌기 때문이다. 이와 반대로 정권 말기에는 구조개편보다는 미흡한 부분을 보완하는 낮은 수준의 세제개편이 추진되는 경우가 많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금년은 조세체계의 근간에 대한 개편보다는 납세 편의의 증진, 불합리한 제도의 보완 등에 집중해 세제개편이 진행될 것으로 예상된다.
세제개편은 가능한 한 기본과 원칙, 조세이론에 합치되는 방향으로 추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통상적으로는 행정부(기획재정부)에서 개편안을 제안하고 각 계의 의견을 수렴해 정부안을 확정·발표한 다음, 당정협의 등을 통해 세제개편안을 확정하고 국회에서의 논의와 의결 및 공포과정 등을 거쳐 시행된다.
초로 제안된 세법 개정안과 실제 국회의 의결을 거쳐 공표·시행된 세제개편 내용 사이에는 종종 상당히 큰 차이를 보이곤 한다. 대부분의 경우에는 조세이론과 기본 원칙에 부합하지만, 의견수렴 과정에서 본래의 개편 취지와 어긋나거나 조세원칙에 위배돼 세제가 개악되는 경우도 있다. 부동산 경기 과열에 대응해 지가 및 주택가격의 폭발적인 상승현상을 잠재우고자 1990년대 초에 도입됐던 토지초과이득세가 대표적이다. 부동산 투기열풍을 잠재우는 데에는 효과적이었으나, 미실현자본이득에 대해 과세함으로써 조세원칙이 위배됐고, 결국 헌법재판소로부터 헌법 불합치 판정을 받기에 이르렀다.
여론에 집착해 단기간에 무리하게 졸속을 추진되는 세제개편은 종종 커다란 후유증을 낳는다. 이런 현상은 대부분 '지속 가능하지 않은 방향'에서 추진되기 때문에 나타난다. 그러므로 세제개편을 추진함에 있어서는 눈 앞에 보이는 당장의 정책효과도 중요하지만, 중·장기적으로 국민 경제에 미치는 영향을 심도 있게 분석·예측해, 부작용을 최소화하는 한편 장점을 최대화시키는 노력이 요구된다.
1990년대 후반 이후 최근까지 소득분배격차가 빠르게 확대되면서 사회·경제적으로 커다란 고통을 겪고 있다. 고령화·저출산 현상이 겹치면서 분배격차 확대에 따른 고통은 더욱 가속화되고 있다. 사회·경제구조의 급속한 변화는 정부의 기능과 역할 강화를 요구하고 있다. 특히 복지 후생 증진을 위한 정부의 역할 확대는 필연적으로 재정의 확대를 전제로 하고 있다. 이를 위해 증세 또는 국채 발행 등이 요구된다. 최근 구미 선진국에서 재정위기가 커다란 사회·경제적 현안이 되고 있다. 우리나라는 GDP 대비 정부의 누적부채 비율이 40%를 밑돌 정도로 아직 낮지만 결코 안심할 수만은 없다. 이를 감안하면 단기적으로는 국채 발행도 하나의 대안이지만, 종국적으로는 복지재정 소요에 대처하기 위한 근본방안으로 증세가 불가피하다.
최근 대선철이 다가오면서 각 당의 후보들은 복지정책을 쏟아내고 있다. 공약사항을 모두 준수하려면 천문학적인 재정이 소요된다. 일부 증세안이 발표되기도 했지만 재정 소요액에 비해 재정수입 마련안은 구체성이 떨어지는 경우가 많다. 당장은 아니더라도 장차 상당한 정도의 증세가 예상된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재정지출 확대를 골자로 하는 공약 중 상당 부분을 실행에 옮기지 못하거나 또는 무리한 공약 추진과정에서 국가 부채가 급속히 증가할 수 있다. 어떤 경우든 정치·경제적 부담이 매우 클 것으로 예상된다.
현재 제기되고 있는 증세방안은 여야를 가릴 것 없이 대체로 부자증세쪽에 상당히 큰 무게를 싣고 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곤란하다. '돈을 내는 샘'이 아무리 퍼내더라도 마르지 않는다면 모르지만, 세상에 그런 샘물은 없다. 무리하게 과세하면 '황금알을 낳는 거위' 자체를 잃어버릴 위험성도 있다.
우리나라는 선진국에 비해 조세부담률이 낮은 반면 경제성장률은 더 높기 때문에 증세의 여력은 상대적으로 크다. 그러나 비록 우리나라의 조세부담률이 선진국보다 낮지만, 약 절반 정도에 이르는 높은 면세자 비율, 낮은 부가가치세율, 넓은 소비세 면세범위, 한정된 일부의 그룹들이 대부분 세부담을 지고 있다는 점 등은 부담스러운 요소들로서 선진국보다 상황이 낫다고 하기 어렵다. 예를 들어 소득세의 경우, 최상위의 10∼20%의 고소득자가 소득세의 95% 이상을 부담하고 있으며, 이들의 실효세율은 이미 선진국 수준이며, 이들의 증세 여력은 빠르게 축소되고 있기 때문에 장차 이들에 대한 증세는 한계에 도달할 수 있다.
반면에 세원이 가장 넓은 부가가치세의 경우에는 세율이 10%로 일본을 제외하고는 가장 낮다. 일본도 조만간 10%로 세율을 인상할 것인 만큼, 부가가치세를 도입한 국가 중 가장 낮은 수준이다. 우리는 흔히 복지사회를 지향하면서 서구 선진국을 모델로 삼곤한다. 그런데 그런 국가들은 예외 없이 조세부담률도 매우 높고, 특히 부가가치세의 세율도 평균 20% 수준에 이르고 헝가리, 덴마크, 스웨덴 등에서는 25%를 넘기도 한다. 정차 재원 마련시에 어떤 방향으로의 개편이 바람직한지 어렴풋하게나마 그 방향을 가늠할 수 있게 해준다.
복지사회를 추구함에 있어서는 그에 수반하는 비용도 함께 부담해야 한다. 이는 곧 증세를 의미한다. 단순히 정치적 논리에 빠져 소수에 국한해 증세를 집중하면, 단기적으로 세수가 증가하겠지만 장기적으로 지속 가능하지 않을 수 있다. 다음 정부를 준비함에 있서 세제개편은 핵심 정책과제 중 하나이다. 어떤 정부가 수립되던지간에 그것이 단기적인 성과뿐만 아니라 장기적으로도 소기의 효과를 나타내 국민경제에 보탬이 되기 위해서는 조세이론 원칙에 충실하면서 지속 가능한 세제개편이 전제돼야 함을 다시 한번 강조하고자 한다.
※본면의 외부기고는 本紙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