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 진실의 변(辨)
내가 그만두고 나니 제일 놀란 사람들은 바로 처가쪽이었다.
하루 아침에 공세(攻勢)에서 수세(守勢)로 돌아선 그들은 자기들이 사정기관에 가지 않았다고 발뺌을 하기에 바빴다.
하늘이 알고 있는 것을! 그때까지도 거짓으로 일관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해왔던 그들의 계획은 물거품이 됐고 절반도 안되는 금액을 달라고 친구를 통해 사정을 하고 나왔다.
사실 수신제가(修身齊家)에 실패한 원인은 이렇습니다.
처가쪽과의 갈등이 본격화된 것은 물론 나와 '시아'와의 만남이 주된 원인이었지만, 갈등의 시작은 오래 전부터 있어 왔습니다.
그것은 첩실(妾室) 소생이면서 신분을 위장한 채 우리 문중을 속이고 시집을 온 사실이 발각되면서부터 입니다.
가문(家門)을 중시하는 의성, 안동 지방에서 그래도 양반집이라는 소릴 듣고 있던 우리 집안에서는 용납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습니다.
나는 "신분이 어떠하더라도 사람 하나 괜찮으면 되지않습니까"하고 부모님을 설득 했습니다. 아버지는 문중이 알면 큰일이라면서 아들의 처가에 관한 얘기는 되도록 피하셨습니다.
이 시대에 가문과 출신 성분이 뭐 그리 중요하냐고 반문할지 모르지만 소위 뼈대 있는 집안과 그렇지 않은 집안은 근본(根本)부터 다르다는 것을 이번 일을 겪고 나서 절실히 느꼈습니다.
지방에서 근무하던 3년 동안 식사와 잠자리는 어떠한지 챙겨주는 아내가 아니라 한두번 내려온 것이 고작인 것처럼 무관심이었고, 아이들에게는 방종으로 일관하며, 시부모님에게는 첨부터 남보다 더 못한 며느리였습니다.
아내가 지어다 주는 그 흔한 보약이라도 한번 먹어봤으면 이런 지경까지는 오지 않았을 겁니다.
이런 답답한 사람을 두고 나는 속은 썩으면서 남들에게는 마누라가 최고인 양 허세를 부려왔습니다.
고모, 삼촌 등 가까운 친족이나 친척들이 누구인지, 문중(門中)어른이 누구인지도 몰랐으며 또 알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종가집 맏며느리로서의 처신은커녕, 마냥 외톨이로 지내면서 친정 식구들만 챙겼습니다.
시동생의 집이 어디에 있는지 생일이 언제인지도 그와는 상관없는 일이었습니다. 이러니 집안 꼴이 뭐가 되겠습니까?
이번 기회에 헤어진다고 하니 우리 집안 친척 대소가(大小家) 모두 대환영이었으며 누구 하나 아쉬워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내가 처가쪽에 했던 10분의 1이라도 시댁에 대해 신경을 써줬으면 이렇게 괘씸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그동안 아내로서, 며느리로서, 종가집 맏며느리로서 그동안 해왔던 그릇된 행실을 그 자신이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사아와 만난 사실 하나를 이유로 마치 이런 기회를 기다렸다는 듯이 처음부터 이혼을 들먹이며 자신의 권리를 돈에만 집착한 채 스스로 포기를 했다고 밖에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이번 기회에 한몫 잡고 동시에 앞으로 닥쳐올 시부모 모시고 살아갈 고생길을 면해보자고 공무원이라는 약점을 이용해 갖은 수단과 방법을 모두 동원해 괴롭혀 왔습니다.
설령 외도를 했다고 해도 그렇게 행동해서야 되겠습니까?
나를 만나서 "나는 당신의 아내요!"라고 해야 되지 않습니까?
시부모나 집안어른을 찾아가서 단 한번이라도 "나는 이 집안 사람입니다"하고 나서야 되는 것이 옳은 일이 아닙니까?
30년을 같이 살아온 사람의 행동이 과연 이래야 됩니까?
자식이 있는 엄마가 할 짓입니까?
돈이 뭐 그리 중합니까? 남편을 잃는데….
많은 분들이 발전을 기원해 주셨고 나의 사정을 잘 아는 분들은 행복을 빌어주셨다.
사정이 사정이니만큼 단 한건의 고문(顧問)건수도 없이 처음부터 무(無)에서 출발하게 된 것이다.
그동안 몇번이고 돌이키려고 마음을 먹었으나 그들과 만나 몇마디 이야기를 하고나면 '이건 아니구나'하는 결심만 굳어갔습니다.
이런 내용을 미리 청장님에게 말씀을 드렸다면 틀림없이 그 분께서도 이해를 하셨을 거라 생각된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구제받고 싶지 않았다.
오히려 내가 이런 결과가 되도록 몰고 갔다는 것이 정답(正答)이다.
그래서 후회나 하등의 회한이 없다.
저쪽에서는 내 친구들을 찾아다니며 중재를 해달라고 애원을 하고 다녔다. 소행은 괘씸하지만 애들 엄마인데…. 어쩌겠는가?
그냥 좋게 해결했다.
마지막으로 만나고 돌아서면서 오히려 그에게서 감사함과 불쌍함과 미안함을 동시에 느꼈다.
새로운 인생을 찾게 해준 것에 감사했고,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저만치 가고 있는 뒷모습이 초라해 보여 불쌍했으며, 나 같은 놈 만난 것에 미안한 맘이었다.
좀더 진실한 삶을 살면 좋겠고, 행복하게 살기를 바랄 뿐이다.
후배님들이여! 이런 것은 절대로 저를 닮지 마십시오.
86. 제2의 인생을 위하여
뻐꾸기가 둥지를 떠났어도 그 둥지는 국세청의 그늘 아래에 있었다.
나는 서초동 남부터미널 부근에서 'ACE세무회계사무소'를 개업했다.
많은 분들이 발전을 기원해 주셨고 나의 사정을 잘 아는 분들은 행복을 빌어주셨다.
사정이 사정이니만큼 단 한건의 고문(顧問)건수도 없이 처음부터 무(無)에서 출발하게 된 것이다.
같이 근무하던 동료들을 만나 가끔씩 골프나 등산, 그리고 해외여행도 가곤 하는데 퇴직을 했어도 직업을 가질 수 있고 할 일들이 있음에 다들 행복해 했으며 국세청 출신임을 자랑으로 여기고 있었다.
그들은 그렇게 골프치지 말라고 했었는데도 언제 어디서 배웠는지 뻥뻥 날려대는 드라이버, 깔끔한 퍼팅실력, 프로선수 뺨을 친다.
그러나 골프가방의 명찰을 실명(實名)으로 바꿔단 이후부터 스코어가 영 신통치 않다는 것만은 진리임을 알아두기 바랍니다.
나는 신변이 정리되고 사무실도 안정을 찾아갈 무렵 2002년 2월에 마음도 정리할 겸 미국으로 가서 '시아'를 만나 같이 귀국을 했다.
우리는 '교육문화회관'에서 양가 친척들과 가까운 친지들을 모시고 단출하게 재결합의 신고식을 가졌고 지금까지 잘 살고 있습니다.
제2의 개청을 경험한 내가 제2의 인생을 출발하게 된 것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