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대로 보내는 인사는 불가능합니다. 예를 들면, 서초서장을 100명이 희망했을 때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한명만 보내주고 99명에게는 욕 얻어먹습니다."
"그러네. 국장급은 벌써 받았는데…."
"이제 받지 마십시오. 적소에 앉힐 적재를 청장님이 찾으십시오."
"못 찾으면 참모들인 국장의 의견을 들으시면 됩니다."
"그런데 청장님 저한테는 한번 물어봐 주십시오."
"응 그래, 박 서장은 어딜 희망하나? 본청 총무과장?"
나는 청장님과 이런 대화가 오갈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갑작스런 상황에 당황이 됐으나 나의 공직생활에 중요한 시점인 것만은 틀림없다고 판단했다.
"예 그리로 보내주십시오. 최선을 다해 보필하겠습니다"하고 나는 단호하게 말씀을 드렸다.
난생 처음으로 나의 인사를 부탁드린 셈이다.
각 계장 이상이 모인 회의실에서 나는 당면업무인 소득세 신고 상황에 대해 간단하게 업무보고를 드렸고 정도세정에 대한 청장님의 지시말씀이 있었다.
신고센터와 각 과 사무실을 둘러보시고 떠나시면서 나를 부르더니 이렇게 말씀하셨다.
"일선 서에서 본청 총무과장으로 막 바로 오는 전례가 없지 않느냐? 본청에 들어와서 한 파스 거치고 그리하면 어떨까" 하신다.
"예 그렇게 하십시오."
"그 대신에 본청 서기관 자리 중에서 누구도 가기 싫어하는 자리가 있을 겁니다. 거기 보내주시고 난 다음에 총무로 보내주십시오"라고 말씀드렸다.
"그건 내가 알아서 할게"하시면서 떠나셨다.
'99.6.21자로 나는 본청 납세지도과장으로 발령이 났다.
청장님은 정말로 누구나 가기 싫어하는 자리를 귀신처럼 찾아내 나를 그리로 보냈다.
79. 정도세정이 사람 잡네
세무공무원 33년 동안 본청 납세지도과장으로 들어간 6월21일부터 9월1일 제2개청일까지 두달 열흘동안 정말 눈코 뜰 사이 없이 바빴다.
기능별 조직 체제에서 납세지도과가 바로 납세지원국이 됐다.
다른 국(局)이나 과(課)는 부서의 명칭만 바뀌었을 뿐 업무 내용은 매 한가지었으므로 아마도 그렇게 고생을 하지 않았을 거다.
그러나 납세지원국은 기존의 '징세과'와 '민원제도과'에다 '납세자보호과'와 '홍보과'가 새로이 신설이 됐다.
업무 매뉴얼을 만들어야 하는데 신설된 두 과의 업무는 나무나 생소했다. 모든 것을 새로 만들어야 했다.
직원들이 일년 내내 쉬지 않고 업무를 할 수 있도록 일감의 내용을 개발해야 하니 정말 어려운 일이었다.
그리고 기업의 CI개념을 도입해 국세청에도 새로운 납세홍보의 패러다임을 구축해야 함은 시대적 요구였다.
'국세 마크'를 새로이 만들어야 하고 각 청사의 현판에서부터 각종 표시판 안내판 등등 모두 새롭게 만들어야 했다.
일의 종류가 너무 많아서 어떨 땐 결재 판을 10개씩이나 들고 다니면서 청·차장님의 결재를 받았다. 여름휴가가 한창인 때이지만 우리 부서는 휴가란 꿈도 꾸지 못하였다.
그리고 각 국실에서 발간하는 책자의 표지를 통일하고 국·실별로 색상을 지정해 구별이 되도록 했다.
국세청 영문표시를 서비스 개념을 도입해 NTS(National Tax Servis)로 바꾸고 나니 세무서 명칭도 바꾸어 보는 것도 검토하라 하신다.
제2개청 일에 맞춰 '국세서비스헌장'을 제정해야 했다.
새로이 만든 국세마크를 넣은 대형 간판도 만들어야 하고, 각 세무서 민원실과 납세자보호담당관실 설치를 위해 각 서별 건물구조에 맞게 선택할 수 있도록 세가지 기본모델을 제시해 주면서 인테리어 공사를 하도록 지시했다. 그리고 공사예산도 보내줘야 했다.
말하기는 쉽지만 이런 일들이 선택되고 결정이 될 때까지는 많은 시행착오를 보완하고 토론과 수정의 긴 과정이 필요하다.
국세마크 하나만 하더라도 50∼60여개의 시안을 만들어 놓고 그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데 그 결심과정을 한번 상상해 보시라. 어디 칼로 두부 자르듯이 할 수 있겠는가?
제2개청일까지 시한은 얼마 남지 않았는데 이것이 빨리 결정이 돼야 현판이나 안내판, 각종 홍보물 등의 제작이 가능하다.
나는 처음부터 최종 결정된 마크로 내심 결정을 하고 윗분들의 결심을 유도해 나갔다.
일의 종류가 너무 많아서 어떨 땐 결재 판을 10개씩이나 들고 다니면서 청·차장님의 결재를 받았다. 여름휴가가 한창인 때이지만 우리 부서는 휴가란 꿈도 꾸지 못하였다.
휴가 떠난 청·차장님에게 졸졸 따라다닐 수도 없고 또 어디로 떠나셨는지 알지도 못한다. 결재 받기도 힘이 들었고 그래서 제대로 일정에 맞춰 추진하기가 정말로 힘이 들었다.
각 청사에 부착할 현판이나 안내판도 최소한 8월28까지는 완성해 도착시켜야 하기 때문에 제작회사인 '○○기업사'를 계속 다그쳤다.
그리고 '정도세정(正道稅政)'을 홍보하기 위해 중앙지에 틈틈이 대형 광고를 게제 하는가 하면, 제2개청의 골격인 기능별 조직 내용을 중심으로 국세청에서 하고 있는 일들을 담은 홍보 팸플릿을 만들어 관계요로와 납세자에게 안내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청장님은 개혁성과로 받은 특별예산으로 많은 지원을 해주셨다.
정말 몸이 열개라도 모자랄 지경이었다.
수없는 나날을 야근으로 지새웠다.
시간이 아까워 가까운 서울호텔에서 잠을 자고 새벽에 출근한 경우도 여러번이었다.
이런 줄도 모르고 처가쪽에서는 '시아'와 같이 밤을 지새는 줄로 오해하고는 갖은 공갈과 협박을 점점 더 심하게 하고 있었다.
미국으로 다시 가버린 그와 어떻게 같이 있나?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