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최초의 전화 개설은 1885.6월 청국과 `한·청전선조약' 체결후 이뤄졌다. 당시 청국전보총국(화전국)의 시공으로 인천·한성·의주를 잇는 1천1백30리의 육로 전선의 가설이 진행됐다.
그러나 재밌는 사실은 시설재 일체와 화전국원이 휴대하는 모든 물품에 대해 관세를 면제했다는 것이다. 특히 가설비에 대한 청국의 차관을 상환할 때까지 청국의 화전국 직원이 전선을 관리토록 하는 등의 특혜 부여로 우리 해관에서는 이들 화전국 직원들로 인해 큰 골치를 앓았던 것으로 보여진다.
각 개항장을 출입하는 청국 화전국원들은 그 자재에 대한 면세 특전을 십분 활용해 휴대품에 대한 해관 검사까지 거부하고 화장품류 및 타 물품의 밀수입과 고려인삼의 밀수출을 자행하는 사건이 비일비재하게 발생했다.
당시 우리 해관원들은 그들의 밀수행위를 지켜보면서도 손을 대지 못했다. 화전국 직원들은 청국상인들과 결탁해 해관을 거치지 않고 유유히 배를 타고 밀수를 자행하면서 우리 해관원들이 붙잡으려고 하면 육공포 권총을 들이대면서 욕을 해대고 달아나곤 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또 한편으로는 시류를 한껏 이용해 한인 화전국원 중에 청인 직원에게 가세하는 자도 나타났는데 이들 중 밀수로 재미를 톡톡히 봐 거부가 된 이도 적지 않았다.
아무튼 첫 개통된 전화는 우리 정부에게 있어 요긴한 물품이었던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당시 해관수입은 왕실의 재정과 직결되기 때문에 총세무사청과 인천해관과의 전화연락이 매우 빈번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덕수궁내 전화 교환대가 있었는데 왕실에는 총세무사를 통해 전선자재의 관세면제 지시를 인천해관에 명령하고 인천 세무사 또는 인천 감리가 매일 외국선박의 출입항 및 해관수입 관계 등을 이 전화로 왕실에 보고했다.
또한 백범 김 구 선생의 전기를 보면 1896.8월 김 구 선생이 명성황후를 시해한 일본인 범인을 잡아죽인 죄로 인천 감옥에 사형수로 갇혀 있었는데 사형직전 `고종(高宗)의 형 집행을 정지하라'는 특별지시 또한 이 전화를 통해 인천 감리에게 즉각 연락함으로써 생명을 구했다는 기록 등도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