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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독하기 2025.06.25. (수)

관세청 30년사 그 숨은 이야기 ③

단속경찰관 폭행등 해상밀수 활개


'60년대 중반까지도 대마도를 중심으로 한 해상밀수특공대는 여전했으며 정부의 수출제일주의 정책을 이용한 밀수가 활개를 떨치고 있었다.

또 주한미군의 PX·APO를 통한 밀수품이 시중에 널리 유통되어 국민경제를 좀먹고 있었다.

특히 대형밀수사건은 대부분 기관원들의 비호하에 이뤄지고 있었기에 경찰관이나 세관의 힘만으로는 단속하기가 매우 곤란해 밀수단속이 한계에 이르고 있었다.

'65.6.6에는 부산세관 옆 월광 카바레 도로상에서 밀수품을 싣고 떠나려는 트럭에 대해 검문하던 경찰관을 군인 수명이 때려서 중상을 입히고 도주하는 `월광 카바레 밀수사건'이 발생했다.

밀수품 운반지점이 평소에는 일반선박이나 민간인의 출입이 금지된 곳인 해군 정보기관의 전용부두라는 점과 단속경찰관에 대한 폭행이라는 사실은 밀수단속 업무에 중대한 전환점이 됐다.

이에 국내산업을 보호하고 국가기강 확립을 위해 대통령의 지시로 세관·검·경·군 4부 `특별합동수사반'을 발족시키게 됐다.

이같은 밀수 근절을 위한 세관과 특별합동수사반의 끈질긴 노력으로 밀수꾼 두목의 항복을 받아내 '69년 해상밀수특공대는 막을 내리게 됐다.

당시 부산세관 감정과장이었던 송병순 한빛은행 이사회의장〈사진〉은 “첩보를 입수해 감시선을 출동, 활동중 이즈하라항 부근에서 쾌속밀수선 영덕호를 발견하고, 도주하던 선박을 향해 기관포를 약 3백발을 쏘았다”며 급박했던 상황을 설명했다.

그 중 한발이 연료탱크에 명중해 격침되고, 쾌속선을 타고 있던 선원 두 사람을 구조해 부산기지로 돌아왔다는 것.

그러나 이즈하라항에는 또 한척의 밀수선이 있었고, 그 중 K를 회유하여 결국 선장의 자수를 받아내는데 성공했다고 한다.

송 이사회의장은 “자수한다면 모든 전과를 용서할 것이라는 공문서를 발급해 줬으며, 그 후 K는 세관직원으로 특채돼 지금까지 잘 근무한다는 소식을 들었다”고 술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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