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므로 한자리에 서서 고개를 돌리지 않더라도 앞과 뒤를 동시에 내다볼 수 있는 몸뚱이기에 문지기로서 가장 적합한 신이었다. 1월을 영어로 january라고 쓴 것도 janus(야누스)의 이름에서 지나간 한해를 돌아보고 동시에 돌아올 한해를 내다봐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역사를 배우는 까닭도 야누스의 안목과 같은 지혜를 갖기 위해서이다. 지나간 역사를 알지 못하면 미래를 예측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따라서 미래는 지나간 역사를 발판으로 딛고 서있지 않으면 안정성을 보장받기 어려워진다. 그런데 우리는 지나간 고난과 시련의 기억들을 너무 쉽게 망각한다고 아쉬워하며 한탄하기도 한다. 이러한 역사 인식의 상황은 조세제도의 역사도 다를바가 없다.
새로운 제도가 나타났는가 하면 몇년 사이에 사라지고, 세제사의 뒤안길로 숨어 버렸는가 하면 다시 부활의 옷을 갈아입고 나타나기도 한다. 부서져 버린 파도가 다시 파도를 만들어 밀려오는 자연의 이치와 같은 것일까? 그러나 인간의 역사를 파도처럼 단순반복해서는 안될 것이다. 그 반복 가운데서 변화와 발전의 모습이 나타나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조세제도가 장족의 발전을 거듭해 왔음은 칭찬받을 만하다. 그 가운데 특기할만한 것은 '75년부터 시행해 온 종합소득세제도와 '77년 7월부터 시행해 온 부가가치세제도의 도입으로 직접세와 간접세의 양대 지주를 형성해 총론적인 골격은 견고한 자리를 잡게 됐다.
그런가 하면 양도소득세,상속 증여세와 같이 재산 형성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세제는 그 변화가 무수히 일어남으로써 헌법이 보장하고 있는 재산권 보호의 법적 안정성과 예측가능성마저 찾기가 어려운 실정에 있다. 예를 들면 '75년의 소득세법에서 부동산 양도소득을 과세대상소득으로 받아들이면서 실제로 발생한 양도차익을 양도소득으로 한다는 원칙을 세웠으나 그후 기준시가에 의한 양도차익 계산 원칙으로 바꾸면서 예외적으로 정부가 지정하는 지역에는 실제 거래가액으로 양도차익을 계산하도록 했다. 따라서 지역마다 정부가 지정한 지역인지의 여부에 따라 세액 계산은 달라지므로 결과적으로 정부가 세율을 조정해 납세자의 세금 부담을 조정하는 것과 다름이 없게 된다.
2003년부터 2005년까지 3년동안에 21번의 지정행위가 있었고 3번의 지정해제가 있었다. 이렇게 빈번한 지정과 해제가 되풀이되면서 국민들은 자기가 소유하는 부동산이 언제 지정되고 해제됐는지도 알기가 어렵다. 소유자에게 이러한 안내의 통지서 한장도 없다. 더욱 더 가소로운 일은 지정한 날부터 실지거래가액을 적용하거나 기준시가를 적용해 양도차익과 계산해야 되니, 뉘라서 자기의 재산에 대한 세금을 예측해 미래의 생활을 설계할 수 있겠는가? 나중에 보면 세무정보에 밝은 소수의 사람들만 줄을 타듯이 잘 소화시켜 부동산 재벌이라는 새로운 간판을 달게 되는 세상이 됐다. 법의 제정목적이 미래예측의 가능성을 부여하는데 있다면 양도시점과 취득시점의 가액 차이를 과세대상으로 삼는 양도소득세는 취득시점의 법을 적용하는 것이 법리에 합당할 것으로 본다.
왜냐하면 어떠한 재산을 취득할 때는 그 재산으로부터 생기는 이득과 그 이득에서 얼마큼의 세금을 부담하고 남는 돈을 예측해 미래의 경제생활을 설계하기 때문에 취득후의 법 개정으로 인해 그 설계가 크게 어긋난다면 그 법은 국민의 법적안정성을 해치기 때문이다.
부동산 투기를 억제하는 일이 아무리 급하다고 하더라도 법의 근간을 흔들어서는 안된다. 根幹이란 뿌리와 줄기를 말함이니 나무도 근간이 서있지 못하면 生長하지 못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 자유주의 경제는 어차피 경기변동의 순환을 일으키면서 성장한다. 오늘 당장 법을 만들어서 내일부터 집행하고 1년도 못 가서 다시 뜯어 고치는 조급증은 치유해야 한다. 황우석 박사가 일으킨 물의도 한국인의 조급 증세에서 비롯된 결과라는 것이 지배적 여론이다.
우리는 과거와 미래를 함께 내다보는 야누스의 안목을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할 때가 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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