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리라는 것이 그렇다. 한번 마음 내고, 손대서 하게 되면 자꾸만 하게 되고, 또 그러다 보면 솜씨도 느는 것 같다.
어제는 모처럼 돈까스를 했다. 퇴근길에 동네 식육점에 들러서 돈까스용 고기를 샀다. 단골이라서 그런지 돼지고기값이 많이 오른 데다 고기를 재우는 데도 기본 양념 외에도 배, 우유, 연유, 키위 등 여러가지가 들어가 남는 게 없다는 밉지 않은 잔소리에 당초 가족수 대로 5개만 사려고 한 것이 10개를 사게 됐다.
그리고 슈퍼에 들러 크림스프와 샐러드용 어묵과 야채 몇가지, 아이들을 위한 애플소다도 하나 샀다. 목이 긴 글라스에 맑은 탄산 거품이 뽀글거리면 아이들이 얼마나 좋아할까.
먼저 달걀을 삶기 위해 물을 끓이면서 샐러드용 오이, 청경채, 어묵을 썰어 아삭거리도록 랩을 씌워 냉장고에 넣어두고, 후식용으로는 찰토마토와 수박을 썰어서 큰 볼에 담아 역시 냉장고에 넣어뒀다. 찰토마토는 월요시장에서 싸게 산 것인데 새파랗던 것이 적당히 익어 먹음직스러웠다.
양식기 세트는 결혼하기 전에 큰맘 먹고 장만한 것인데-분위기 한번 잡아볼 것이라고- 아직 몇번 쓰지 않아 반짝반짝 윤이 났다. 너댓살이 된 아이 둘이 있어 양식기를 들고 식사한다는 것이 가당키나 한 일인가?
칼과 샐러드용 포크, 고기용 포크, 수프용 숟가락을 식구 수대로 내어서 정돈해 두고, 넓은 접시와 움푹한 스프용 접시도 흐르는 물에 대충 씻어서 마른 행주로 훔쳐뒀다.
목이 긴 글라스는 숫자가 몇개 없어 결혼전에 신랑이 해돋이용 이벤트로 준비한 부부글라스 두개, 선물용 양주세트에 끼워 온 글라스 3개 등 집에 있는 것은 종류별로 다 동원했다.
이렇게 돈까스를 준비하고 양식기 세트를 닦다 보니 친정아버지 생각이 났다.
친정아버지는 내가 집에서 만들어 주던 돈까스를 아주 좋아하셨다. 가끔 기분이 나면 소스도 직접 흉내내 만들어서 고기 위에 끼얹어 내기도 했는데 보기에도 그럴듯한 것이 별식이라며 즐기셨다.
처음에는 젊은 우리들 음식이라 어른이 좋아하실까 싶었는데 의외로 이런 음식을 먹게 되니 입맛도 기분도 젊어진 것 같아 좋아하셨던 것 같다. 사실 그때 사십 중반인 아버지 나이에 엄마나 혹은 다른 손님과 레스토랑 같은 곳에 들어가서 양에도 차지 않는 조그만 고기 덩어리 하나 썰면서 점잔빼며 식사한다는 것이 쉬운 일도 아니었을 것이다.
그다음부터는 한달에 두어 번은 아버지를 위한 스페셜 메뉴인 '홈 돈까스'를 만들어 드렸으며 반응이 좋아서 나의 요리영역은 오무라이스, 스파게티 등으로 점점 넓어져 갔다.
나이가 들면 입맛도 변해서 된장찌개, 젓갈 같은 좀 껄끄러운 음식들이 편해진다는데 아버지 입맛은 오히려 더 젊어지는 모양이었다. 아니면 딸들 중에서 당신과 유난히 잘 부딪치던 둘째딸의 마음을 좀 포섭해 볼 요량이셨을까?
나는 이제 남편과 아이들 그리고 시어머니에게 이 음식을 계속 해 드릴 수 있지만 집에 계신 아버지께는 누가 해드리나 하고 생각하니 가슴이 막막해졌다.
넓은 접시에 잡곡밥과 구운 돈까스 하나, 반으로 자른 달걀을 올리고, 크림수프는 따끈하게 다시 데워서 움푹한 접시에 찰랑하도록 담고, 약간 큰 볼에는 샐러드와 과일을 담뿍 담아 상 중앙에 놓았다.
예쁜 글라스 세개에는 시어머님이 집에서 담근 매실주를 반쯤 채우고, 나머지 두개에는 냉동실에서 약간 얼린 애플소다를 가득 채워 길고 긴 저녁상이 완성됐다.
"엄마, 오랜만에 돈까스 했네? 내일 또 해줘!"
큰아이는 요사이 '오랜만에∼했다'는 표현을 배웠는지 자주 써먹는다. 제딴에는 그 말이 아주 근사해 보이는 모양이다.
우리 다섯식구는 색다르게 푸짐한 식탁에 둘러앉아 근사한 글라스를 들고 서로의 건강을 기원하는 건배를 하고 맛있게 자기몫의 음식을 먹어치웠다.
이들에게는 목이 긴 글라스에 담긴 애플소다가 단연 인기였다. 수프에 돈까스에 식사를 다 하고도 음료수 한병을 둘이서 번갈아 가며 다 비워버렸다.
밤이 깊어지니 한낮의 더위는 수그러들고 시원한 바람이 베란다를 통해 들어왔다. 베란다에는 화원에서 모종을 사다 심은 고추, 가지, 방울토마토가 애기별 같이 하얀 꽃을 달고 저녁 바람에 푸들푸들 되살아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결혼할 때 아버지께서 분갈이를 해주신 유자나무가 봄에 새로 돋아난 연두색 잎을 제법 넓게 키우고 있었다.
유자나무는 특유의 달콤한 진물 덕분에 깍지벌레가 잘 끼이므로 자주 닦아주어야 한다. 유자나무 잎을 닦다보면 은은한 유자향이 손에서 배어나 기분이 좋아진다.
아버지께서도 그맘때쯤 베란다에 나와서 시원한 런닝 차림으로 저녁바람을 맞으며 유자나무 버팀목을 고쳐 세우고, 이파리도 빛나게 닦고 계셨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