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들은 바캉스에 캠핑이다 뭐다 산으로 강으로 떠났지만 석은 방학 다음날부터 오전에는 시립도서관에서, 오후에는 아르바이트로 시간을 보내기로 하고 책과 씨름을 하고 있었다.
그때 누군가가 뒤에서 어깨를 톡톡 치는 사람이 있어 돌아다보니 뜻밖에 그애가 콧잔등에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혀 발갛게 된 얼굴로 잠시 좀 보잔다. 지난번에 약속하기로는 만나지도 말고 특히 도서관이나 사람들이 모이는 공공장소 같은 데서는 서로가 아는 척 하지말기로 했는데, 갑자기 무슨 일일까 싶어 밖으로 따라 나오니 하얗게 실눈 웃음을 지으면서 숙제하는데 도와달라고 했다. 뜬금없이 숙제라니 멀뚱하게 쳐다보고 있는데 다른 사람이 보고 있으니 빨리 따라오라면서 앞서 갔다.
아침에 까치가 울드니만 오늘은 무슨 좋은 일이 있을 것같은 예감이 들었는데 그 애를 만날라고 그랬는가. 그래, 하는 수 없이 따라가 봐야지.'
그애는 도서관을 훨씬 벗어나 시내버스 타는 승강장에 와서야 안심하고 이야기를 했다. 여름방학 숙제로 우리 고장의 이름난 유적지나 고적지, 명사들이 태어난 곳 등을 답사하고 기행문을 써내야 되는데 자기는 그 장소로 인근 월성군 모량리의 목월 선생님의 생가를 방문하기로 했다면서 길을 알고 있는 석에게 같이 동행해 줄 것을 부탁했다. 목월 선생님의 생가.
경주시내에서 30리 떨어진 건천읍 모량리라는 단석산 아랫동네이다.
한시간이상 기다려서 시내버스를 타고 모량리에서 내려 철로길을 건너 들길을 따라 십여리 되는 살구징이라는 곳을 향해 걸어갔다.
동네 초입의 미루나무 몇그루에 붙은 매미소리가 요란스럽게 울어대고 마을안은 전형적인 시골냄새가 풍기는 조용한 마을이었다. 봄이면 집집마다 살구나무꽃이 만발하여 살구징이(언덕)이라 불리우는 곳. 선생님의 고택은 초가집으로, 두어칸 방의 큰채와 사랑채는 방이 하나에 소 키우는 마구간으로 되어 있었다.
집뒤로는 김유신 장군의 전설이 서려 있는 단석산의 높은 봉우리가 위용을 자랑하고 앞쪽으로는 건천들판이 훤히 보이는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굴뚝옆에 오동나무 두 그루가 있고 싸리나무 대문 안쪽으로는 오래된 대추나무와 감나무 등으로 둘러 싸여 있는데 집주인은 목월 선생님 가족이 아닌 몇년전에 집을 사서 들어 온 50대의 촌로였다. 무뚝뚝한 모습으로 어린 학생들이 이 무더운 여름에 쓸데없이 땀을 뻘뻘 흘리며 여기까지 왜 왔냐는 표정으로, 묻는 질문도 귀찮은 듯 대답이 시원찮았다.
'윤사월 눈먼 소녀의 잔상과 강나루 터의 밀밭 길' 같은 목월 선생님의 체취를 연상하면서 가슴 부풀게 찾아갔는데 생각했던 것보다 실망이 컸다. 다만 토담옆의 봉숭아꽃이 만발해 어린 손님을 반겨줄 뿐이었다.
그애는 손톱에 물들인다며 좋아라 했다. 꽃잎을 따서는 침을 묻혀 이마에, 연지볼에 하나씩 붙이고는 혓바닥을 길게 하고 침을 잔뜩 묻혀서는 석의 콧잔등에도 한 잎 붙여주고서는, "내게 관심이 많으면 안 떨어지고 오래 붙어 있고 그렇지 않으면 금방 떨어질 것이로다"하면서 주문을 외우듯 말했다.
콧잔등이 간질간질하고 웃음과 재채기가 나와 단숨에 꽃잎이 허공으로 날아갔다. 그애는 너무 관심이 없다면서 응석을 부렸다. 이제는 석의 차례. 침을 묻혀 그 애의 눈썹 위에 봉숭아 꽃잎을 하나씩 붙여 주면서, "하늘 한번 쳐다 봐, 꽃이 하늘이 되고, 하늘이 꽃이 될끼다" 그애는 덧붙여서 "니도 꽃이 되었네"라며 떨어지려는 꽃잎을 다시 손으로 꾹꾹 누르면서 맑고 꾸밈없는 웃음으로 석에게 다가왔다.
집앞 동산에 올라가 점심을 먹었다. 그애는 도시락 두개를 싸 가지고 왔다. 반찬을 정성스레 준비한 것 같았다. 어릴적 소풍가서 먹던 도시락처럼 맛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