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애 혼자서 결정한 약속이지만 시간과 장소를 알고 있으면서 그냥 모른 척하고 넘어가기에는 양심이 허락치 않고, 그렇다고 만나지 않겠다고 대답해 버리면 사나이의 체면문제도 있고… 갈까? 말까? 망설임과 초조함 속에 20여분쯤 지났을까? 아니 두시간도 더 지난 느낌이다. 기다리고 있음을 알고도 약속장소에 가지 못하는 심정과, 언제나 나타날까 무작정 기다리고 있는 사람의 심정은 누가 더 속이 탈까. 다시 10여분이 지나갔다. 이제는 결단을 내려야 할때, '그래 가보자, 왜 보자는지 일단 만나 보기나 하자, 아무것도 모르고 언제까지 기다리고 있을 그 애에게 더이상 실망을 안겨줄 수는 없지…'
막뛰었다. 마음이 급하니 달리기를 해도 발걸음은 제자리에서 움직이는 것 같았다. '아직 기다리고 있을까, 아니 가 버렸을까, 제발 기다리고 있어다오 피앙새야!' 드디어 첨성대가 보이고 희미한 달빛 아래 석축에 기대어 실루엣처럼 서 있는 그림자가 있었다. 감격과 미안함, 그리고 변명 아닌 변명이 자연스럽게 나왔다.
"야! 늦어 미안하다. 많이 기다렸제? 시골에 갔다 지금 막 오는 길인데, 어이구 숨차네…"
헐레벌떡 뛰어오는 석을 보고도 아무런 말이 없다. 때마침 구름에 벗어난 달빛이 그 애의 얼굴을 스쳐갔다. 꽉 다문 입술, 눈가에는 반가움과 원망이 함께 섞여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는 계림숲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숲을 지나 향교 앞까지 오는 동안 서로가 아무 말이 없었다. 옆에서 따라 걷던 석은 멋쩍은 분위기에 무어라고 말을 붙여 보고 싶건만 언뜻 생각이 나지 않았다.
발걸음은 어느새 반월성 옆을 흐르는 남천 냇가에 다달아 잠시 멈추었다. 한낮에 달궈진 불볕 더위도 서늘한 강바람에 쫓겨나고 가까이 금오산 자락이 밤 안개에 젖어 나즈막하게 자태를 들어내며 졸고 있고, 달빛이 비치는 강에는 푸른 상현달이 하나 더 떠 있었다. 옛날 왕궁과 금오산 사이를 연결했던 월정교터 자리는 교각의 주춧돌이 남아 자연적으로 징검다리 구실을 하고 있었다. 석이 먼저 성큼성큼 돌다리를 건너가면서 마침내 말을 꺼낼 구실이 생각이 났다.
"희야! 재미있는 이야기 하나 해줄까? 옛날 신라시대에 어떤 괴짜 승려가 살았는데 다 떨어진 누더기 옷을 걸쳐 입고 성안을 돌아다니면서, '어느 누가 나에게 자루없는 도끼를 빌려 주려나, 내가 하늘을 떠받칠 기둥을 찍으리라'고 외치고 다녔는데 아무도 그 뜻을 몰라 다들 미친 중이라 놀리고는 사람 취급을 하지 않았는데, 그 도사님이 어느 겨울날 금오산을 내려와 지금 건너고 있는 바로 이 자리에 옛날에는 월정교라는 다리가 있었는데 다리위를 지나가다가 어찌저찌하여 마 다리밑에 널쪄 뿌렸는기라, 그래 갖고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는데 그때 마침 혼자 사는 요석 공주님이 지나가다가 그 모습을 보고 불쌍히 여겨 신하들에게 자기가 사는 궁으로 데리고 가서 옷이나 말려 입혀 보내라고 했는데 옳다 싶어 스님은 그곳에서 나가지 않고 주저 앉았뿌렸는기라…. 그 스님이 누군고 하니 그 유명한 '원효'라는 스님 아이가…."
잠시 말을 멈추고 뒤를 돌아다보니 그 애는 돌다리의 간격이 좀 넓어 한번에 폴짝 뛰어 건널 수 있을는지 망설이는 모양이다. "괜찮아 뛰어봐! 내가 잡아 줄게" 용기를 내어 징검다리를 건너던 그 애가 약간 비틀거렸다. 석은 얼른 '잘 뛰네' 하면서 손을 잡아 주었다. 순간적으로 느껴오는 따뜻하고 촉촉한 손의 온기가 찌르르 가슴에 와 닿았다. 그 애는 자연스럽게 잡힌 손에 힘을 주면서 드디어 말문을 열었다.
"그렇게 해서 어떻게 되었는데??"
"어떻게 되기는, 요석 공주님은 열 달 후에 설총이라는 위대한 대 학자를 낳았지(이게 하늘을 받치는 기둥인감...?)."
"호-호 설총이라 어디서 들어본 것 같기도 한데, 그런데 원씨 아저씨가 설씨라는 성씨의 애기를 낳아도 돼?"
" 바보야! 원효 스님의 성씨는 원씨가 아니고 같은 설씨야, 어릴적 이름은 서동이고. 그리고 '一切唯心造에 無碍行'이라는 말을 남긴 그 시대의 대단한 고승이요 사상가였지. 그 뜻은 '세상사 모든 것은 다 마음이 짓는 것. 마음을 비우고 산다는 것은 그 어떤 것에도 구속되지 않는 자유를 얻는다는 것'이란다."
"아이구, 너무 어려버서 무슨 뜻인지 도무지 모르겠네, 그건 그렇고 야! 방청소 좀 잘하고 다녀라, 왜 그리 지저분하노…"면서 오늘 낮에 자취방에 다녀간 이야기를 시작해 그동안 미루어 놓았던 이야기를 쭉 늘어 놨다.
친구를 통해 들었다면서 시골에 계시는 석의 아버지께서 많이 아프시다면서? 안부를 물었다. 또 요즘 도서관에 공부하러 왜 오지 않는지, 지난번에는 왜 보고도 모른 척 지나갔는지 등에 대해 물어왔다. 그리고는 가장 궁금한 것이 있다면서 정색을 하고 물었다. 언제 자기 오라버니나 아니면 아버지를 만난 적이 있는지? 만났다면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 달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