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강북구 미아동 일대에서 100억원대 부동산 사기행각을 벌이고 도주한 고모(40·여)씨가 지난 3일 수배 1년 만에 경찰에 붙잡혔다. 고씨는 강북경찰서에만 총 4건의 고소장이 접수된 상태였다. 법원에도 추가로 1~2건의 민사소송이 걸려 있었다.
고소인 중에는 고씨의 시매부(시누이의 남편) 등 가족들도 포함돼 있었다. 특히, 고씨의 딸이 자신의 "엄마를 처벌해달라"며 9장 분량의 탄원서까지 작성해 검찰에 제출할 예정이다. 과연 고씨에게는 무슨 일이 있었길래 가족들까지 등을 돌렸을까.
이번 사건이 경찰에 신고된 시점은 지난해 9월 초. 고씨의 시누이와 시매부 등 가족이 "고씨를 처벌해달라"며 경찰서에 찾아왔다. 고씨가 가족의 돈 40억원을 빌려간 뒤 어디론가 빼돌리고 사라졌다는 내용이었다. 같은 경찰서에 이미 3건의 신고가 접수된 상태였다.
시매부 윤모(43)씨는 이 때까지 이런 사실을 전혀 몰랐다. 가족들만 피해를 입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경찰서에 와 보니 상황은 심각했다. 신고를 마치고, 고씨가 장사를 하던 동네에 가보니 주변인들로부터 이런저런 흉직한 소문이 나돌았다. 그 전까지는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고씨는 이 동네 아파트 단지 상가에서 10년 넘게 공인중개사 사무실을 운영해왔다. 올해 마흔살로 20대 후반부터 부동산 일을 시작했다. 집 주변에 부동산을 차리면서 단골 고객도 꽤 많았다고 한다. 고씨는 자상한 성격과 특유의 말주변으로 주변인들로부터 호감을 샀다.
남편 집안이 인근에서 부잣집으로 소문나 있었고, 은행원으로 재직 중이어서 신뢰도 컸다. 이런 신뢰를 바탕으로 고씨는 주변 사람들에게 부동산 투자를 권유했고, 급하게 나온 매물을 잡기 위해 돈이 필요하다며 여러 차례 급전을 빌려다 썼다. "이 매물만 잡으면 큰 차액을 남길 수 있다"며 투자를 권유하기도 했다.
빌린 돈의 2부(한 달에 원금의 2%) 이자를 주기도 했다. 주변에서는 아무런 의심없이 투자에 응했다. 가족을 포함해 주변인들로부터 투자 명목으로 빌린 돈은 총 100억원에 달했다. 눈덩이처럼 불어난 이자에 고씨는 결국, 자취를 감췄다. 이 때부터 이자지급도 당연히 중단됐다.
피해자 가운데는 인근에서 장사를 하는 세탁소, 중국집, 선술집, 금은방 주인까지 셀 수 없이 많았다. 좋은 투자정보라는 생각에 서로 쉬쉬해오는 동안 피해금액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남편 명의로 받은 캐피탈 대출도 수억원, 사채까지 끌어다 쓴 친척도 있었다.
고씨가 처음부터 이랬던 것은 아니라고 한다. 사고를 당하면서 사람이 변했다고 가족들은 설명했다.
지난 2005년경 고씨는 불의의 사고를 당했다. 친정식구까지 온 가족이 함께 주말 나들이를 나갔다 돌아오는 길에 대형 교통사고를 당해 남편은 다리에 장애를 얻었고, 자신은 한 쪽 눈과 광대 등 얼굴 반쪽을 잃었다. 고씨의 어머니는 이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뒤에 타고 있던 아버지와 딸도 상태는 심각했다.
사고 이후 보험사로부터 거액의 보상금을 받았지만 후유증 컸다. 부모를 잃었고, 남편의 다리가 불편해졌다. 본인은 얼굴을 크게 다치면서 수술을 받고도 정상적인 생활이 어려웠다고 한다. 부부관계가 소원해진 것도 이 때쯤이었다. 때문에 고씨의 시댁 식구들은 물심양면으로 고씨를 도왔다. 필요하다고 하면 수시로 금전적인 지원도 해왔다.
하지만 여기 저기 빌린 돈이 쌓이면서 빚 독촉에 시달렸고, 고씨는 가족들에게 손을 내밀기 시작했다. 남편 이름으로 몰래 수억원의 사채를 끌어다 쓰기도 했다. 결혼을 앞둔 시매부에게도 70여 차례에 걸쳐 총 20억원을 가져갔다. 이자를 받으면 곧바로 돈을 빌려달라고 하는 탓에 액수는 점점 불어났다.
그러던 중 갑자기 고씨가 돌연 자취를 감췄다. 사라지기 전 딸 아이는 브라질로 유학보내겠다며 해외로 보냈고, 남편은 이미 빚 독촉에 시달려 직장을 그만 둔 상태였다. 빚쟁이들은 전부 남은 가족들에게 찾아와 변상을 요구했다. 하지만 집은 담보를 잡혀 은행으로 넘어갔고, 사무실도 문 닫은 상태였다.
경찰이 수사에 나섰지만 고씨는 수시로 거주지를 옮기고, 휴대전화 유심칩을 바꿔 소재지가 파악되지 않다가 11개월간의 탐문수사 끝에 지난 3일 경기도 화성시 진안동 한 원룸에서 검거됐다. 붙잡힌 고씨는 의외로 초라한 행색에 집밖으로 거의 나오지 못하고 안에서만 은둔 생활을 해온 것으로 전해졌다.
경찰 조사 결과, 고씨는 돈을 빌리면서 수십여개의 통장으로 분산해 돈을 받았고, 이 중에는 딸의 명의, 남편의 명의로 된 통장도 있었다. 이름도 개명했다. 때문에 자신 명의로도 여려 개의 통장이 있었다.
고씨는 경찰에 자신의 잘못을 모두 인정하지만 100억원대에 달하는 피해액은 "이자를 돌려막기 하는데 쓰느라 한 푼도 남아 있지 않다. 죄값을 받겠다"고 진술했다. 경찰은 고씨를 사기 등 혐의로 구속해 검찰에 송치했다.
하지만 주변인들은 한 마디로 "고씨가 사라지면서 주변은 쑥대밭이 됐다"고 설명했다. 가족들은 모두 빚더미에 올랐고, 고씨의 딸은 그가 도주하기 전 브라질로 보내진 채 연락이 끊겨 비행기 표 값이 없어서 한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주변인들은 고씨가 '이중생활'을 해왔다고 주장하고 있다. 고씨의 이런 모습을 아무도 몰랐고, 남편, 아이까지 속여왔다는 것이다. 배후에는 10년 넘게 같은 사무실에서 일하던 남성과 내연관계로 돈을 모두 빼돌렸을 것이라는 주변인들의 주장도 있다.
실제 경찰이 고씨를 추적할 때도 내연남과의 통화내역을 통해 주거지를 확보한 것으로 전해졌다.
그러나 법정 한도를 넘어선 이자를 받으면서 투자성격이 돼 권리를 주장하지 못하거나 소액으로 신고를 꺼리는 피해자들도 있었다. 또 남편 등 가족들은 돈이 오간 증거가 명확치 않아 신고를 못한 건도 여러 건 됐다.
피해자들은 경찰에 "범죄수익금에 대한 철저한 추징이 필요하다. 사후조치에 나서달라"고 호소하고 있다. 또 사기 사건의 피의자가 초범인 경우 금액과는 상관없이 일반적으로 징역 2년형을 받고 풀려나기 때문에 처벌 강도가 낮다는 점을 우려하고 있다.
고씨의 딸 황모(17) 양도 검찰에 "엄마를 처벌해달라"는 탄원서를 제출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