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故) 김영삼 전 대통령은 1992년 12월 치러진 제14대 대통령선거에 당선돼 군부독재 시대의 종언과 함께 문민정부 시대를 열었다.
재임 기간 금융실명제 도입과 고위 공직자 재산 공개, 하나회 척결,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 등 성과를 거뒀지만 무리한 개방과 세계화 정책으로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를 불러왔다는 아쉬운 평가도 있다.
◇'금융실명제 도입'으로 금융거래 투명성 ↑
특히 금융실명제 도입은 김영삼 정부의 대표적인 업적으로 평가된다. 금융실명제는 전두환·노태우 정부 시절에도 논의되긴 했지만 김영삼 정부가 들어서면서 비로소 속도감 있게 추진됐다.
금융거래의 정상화를 통해 경제정의를 실현하고 국민경제의 건전한 발전을 도모한다는 취지로 도입된 금융실명제는 1993년 8월12일 오후 7시45분 "이 시각 이후 모든 금융거래는 실명으로만 이뤄집니다"라는 당시 김 대통령의 특별담화 발표로 전격 실시됐다.
당시 금융실명제 주요 내용에는 ▲모든 금융기관과의 거래에서 개인 및 법인은 반드시 실명 사용 ▲기존 비실명 금융자산의 소유자는 실명 전환 의무기간 중 실명 전환 ▲금융거래정보의 비밀보장 강화 등이 포함됐다.
이후 금융실명제는 금융거래의 투명성을 높이고 세원을 발굴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정치·경제·사회적 부패 고리를 끊는 데 이바지했다는 평가도 받는다.
◇고위 공직자 재산 공개, 하나회 척결 등
김 전 대통령은 취임 이후 강한 개혁 드라이브를 걸었다. 특히 1급 이상 공직자의 재산을 공개하도록 했다. 지금은 관보 등을 통해 고위 공직자의 재산 내역이 공개되는 것이 자연스럽지만, 이는 김영삼 정부 집권 1년차의 핵심 개혁 과제 중 하나였다.
김 전 대통령은 당시 자신의 재산 내역을 공개하며 공직자 재산등록 공개 제도를 강하게 추진했다. 그 결과 법개정까지 이뤄지면서 1993년 9월6일 헌정 사상 처음으로 입법·사법·행정부와 중앙선거관리위원회, 헌법재판소의 1급 이상 공직자 1160여명의 재산이 일괄 공개됐다.
정치개혁의 일환으로 1995년 지방자치단체장 직선제를 도입함으로써 지방분권의 첫 기틀을 마련하기도 했다.
김영삼 정부는 '역사 바로 세우기'에도 주력했다. 일제시대의 상징이던 옛 조선총독부 건물이 철거되고 쇠말뚝이 뽑히는 등 일제 강점기 잔재를 청산하는 작업이 진행됐고, 국민학교 명칭도 초등학교로 바뀌었다.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에 대해선 부정부패와 12·12 쿠데타에 대한 역사의 죄를 물었다. 군 개혁에도 박차를 가해 1979년 12·12 쿠데타를 주도한 이후 군을 장악해온 사조직 '하나회'를 해체시켰다. 비밀스러운 권력의 상징이던 청와대 안가를 철거하고 청와대 앞길도 개방했다.
◇세계화 추세 맞춰 시장 개방 정책…임기말 IMF 위기 맞아
김영삼 정부는 세계화 추세에 맞춰 기업에 대한 규제를 줄이고 금융시장과 자본시장을 개방하는 정책을 펼치는 데 힘을 쏟았다. 특히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을 위해 금리자유화 정책을 중점적으로 추진했다.
김영삼 정부는 1996년 9월 OECD에 가입하면서 선진국 대열에 들어서기 위한 기반을 닦았지만 이듬해 금융·외환 상황이 급격히 악화되면서 결국 1997년 11월 IMF에 긴급구제금융 지원을 정식으로 요청하게 된다.
이를 두고 대내외적으로 "한국이 샴페인을 너무 일찍 터트렸다"는 비판과 함께 성급하게 자본시장을 개방하면서 위기를 자초했다는 지적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