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검색

구독하기 2025.12.14. (일)

내국세

서영택 국세청장, 부동산투기억제 '총력'

-창간 50주년 기념 기획특집-

서영택 청장 부임 직후부터 국세청은 부동산투기 관리를 제1의 과제로 삼을 만큼 모든 역량을 부동산투기 억제에 쏟아부었다. 이전 부동산투기 억제행정과는 강도면에서 차원이 달랐다. 수시로 청장이 직접 나서 부동산투기 억제 기자회견을 열었고, 전국세무관서장회의에서도 중점추진과제 1순위는 부동산투기억제였다.

 

1988년 3월 5일부터 1991년 12월까지 서영택 국세청장 재임 3년 10개월 동안 국세청은 부동산특정지역 확대고시 4회, 부동산관련 관서장회의 7회, 투기자명단공개 3회, 부동산종합대책발표 3회 등 부동산투기에 관한한 촌각의 여유를 두지 않았다. 그리고 1990년 2월 국세청 직제에 부동산대처기구를 신설한다. 본청과 서울국세청에 재산세국, 5개 지방국세청에는 재산세과를 신설, 부동산업무를 전담토록 했다.

 

 

'부동산청' '부동산 청장' 이라는 닉네임이 붙을 정도로 서영택 국세청장은 왜 그렇게 부동산투기에 대해 엄격했을까.

 

우선 부동산투기가 그만큼 심각했기 때문이다. 일부 외국 언론은 '한국에 망국병이 좀먹고 있다'고 부동산 투기만연을 꼬집을 정도였는데, 이는 시대적인 여건과 정치상황이 국세청을 가만히 놔두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그 원인은 '정치꾼'들의 책임이 절대적이다.

 

'80년대 초부터 시작 된 '확장경제'로 인해 시중에 넘쳐난 유동성은 대부분 지하경제로 숨어들었고, 1987년 12월에 치러진 대통령 선거는 '부동산 화약고'에 불울 붙인격이 됐다. 노태우 집권여당 대통령후보는 전국유세에서 가는 곳 마다 개발공약을 쏟아 냈다. 넘쳐나는 돈은 자연히 노 후보의 말한마디에 이리저리 밀물처럼 몰려다녔다, 부동산투기가 일어날 수 있는 최상의 여건이 조성 돼 있던 터에 노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 됐으니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는 형국이 된 것이다.

 

또 국세청의 부동산투기에 대한 대처능력이 다른 기관들에 비해 '특출'했다는 점도 빼 놓을 수 없다. 건교부나 검찰, 지자체 등에서 부동산투기에 대한 대책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거기서는 꿈쩍도 않던 투기꾼들이 국세청 움직임에는 촉각을 곤두세웠다. 그런 상황이 계속 반복되다 보니 부동산투기가 일어나면 모두 국세청만 바라보게 됐고, 그 부분에 대해서는 조세학계에서 문제점으로 지적 한 적이 있다.

 

국가적 대사인 올림픽을 유치 한 장본인 전두환 전 대통령은 올림픽이 열리고 있는 그 시간 국회 5공비리조사특위에 의해 출국이 금지되는 등 '5공청산' 과정을 거치고 있었다. 마침내 전 전대통령은 1988년 11월 23일 서울 연희동 자택에서 TV 생중계 되는 가운데 '재산일체를 사회에 환원한다'고 밝히면서 입술을 꽉 깨문 모습을 남기고 강원도 백담사로 들어갔다.

 

전국적으로 노도와 같이 번진 부동산투기는 노태우 대통령이 불을 당겨 놓고, 그 뒷치닥거리는 서영택 국세청장이 떠맡은 셈이 됐다. 그런 상황에 대해 세정가 사설가들은 '노태우가 경북고 동문인 서영택을 국세청장에 앉혀 악역을 맞긴 꼴이 됐다'고 회자했다.

 

그러나 전국적인 부동산 투기광풍은 서영택 국세청장의 강력한 의지에도 불구하고 수그러들기는커녕 더 넓게 퍼져 나갔다.

 

마침내 1990년 비전문가가 봐도 '초법적'이라는 것을 감지할 수 있는 '토지초이득세'가 도입됐다. 미실현 소득에 대한 과세라는 점에서 토지소유자는 물론 학계와 재계 등에서 강력히 반대 했지만 소용없었다. 부동산투기에 대한 부정적인 정서와 정부의 강력한 입법의지가 토초세 반대논리를 완전히 제압해버린 것이다.

 

국세청은 법을 집행하는 것 뿐인데도 납세자들의 불만표출은 대부분 국세청으로 향했다. 그러나 국세청의 대응은 강경했다.

 

1991년 7월 서영택 국세청장은 토초세부과 예정통지를 10여일 앞두고, 토초세를 완화하거나 보완할 계획이 없다고 발표했다. 또 반대가 가장 극심했던 경기도 영종도와 대구수성지구 등 집단민원 발생지역에 대한 구제책도 없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발표 이후 납세자들의 불만은 더 커졌다. 수송동 국세청 앞에서 시위를 벌이는가 하면 전국 세무관서 곳곳에서 납세자와 직원간 마찰이 비일비재했다. 일부 납세자는(영종도 주민) 무리 지어 한국세정신문사를 찾아와 토초세의 부당성을 호소하기도 했다.

 

3년 단위로 유휴토지의 지가상승분 30∼50%를 세금으로 부과하는 토초세는, 숱한 논란 끝에 1994년 헌법재판소 헌법불합치 결정을 받고 1998년에 폐지됐다. 그 기간동안 국세청이 쏟아 부은 행정력은 차치하더라도 국세행정과 국가정책에 대한 국민신뢰는 엄청난 손상을 입었다. 큰 대가를 치른 것이다. 

 

서영택 국세청장은 재임기간 중 많은 부분을 부동산 투기억제에 몰두 하면서도 국세청 조직보강과 기업들의 납세순응도 향상에 심혈을 기울였다.

 

세금계산서 검인제도 폐지와 기업 비업무용 토지관리 강화, 기업접대비 지출명세서제출제도 개선 등은 좋은 평가를 받았다. 특히 직·간세 기능별로의 조직 개편과 신용카드사용 확대 방안 등은 많은 공감을 받았다.      

 

반면 직원 인사부분에 관해서는 상대적으로 좋은 평을 얻지 못했다. 인사라는 게 원래 다 만족할 수는 없는 것이지만 'TK우대'라는 인사 후평이 인사때 마다 거의 단골처럼 따라다녔다. 또 어디까지나 주관적이지만 '차갑다'는 말이 세정현장 안팍에서 흘러다니기도 했다.

 

서영택 국세청장은 1991년 12월 19일 건설부장관으로 영전했다. 후임 제 8대 국세청장에는 추경석 국세청 차장이 12월 21일자로 임명됐다. <계속>

 

<서채규 주간> seo@taxtimes.co.kr

 

      

 

 

 

 

 

 

 






배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