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 서울청 간세국장 3개월
98년 새해 1월1일 임채주(林采柱) 청장은 나를 서울청 간세국장으로 발령했다. 조세연구원에 파견 근무한지 만 2년이 됐는데 대대로 부이사관 초임 승진자의 처음 보직자리에 나를 발령했다.
지난해 초 부이사관 교육이수자들에 대한 인사에서 제외됐고, 지난해 7월 서울청 국장 자리가 공석일 때도 문이 열리지 않더니 이번에는 발령은 났으나 활짝 열린 문은 아니었다.
98년 새해는 그 어느 해보다 나라 사정과 관가의 분위기가 불안하고 어수선했다.
나라 경제는 IMF비상관리체제하에서 도산하는 기업이 속출했고, 새 정부 출범을 앞두고 장·차관 인사 하마평을 매스컴들은 앞다퉈 쏟아내고 있었다. 국세청장 후보에 대하여서도 세칭 권력의 빅4 중의 하나라고 하여 특정 인물들을 거론하고 있었다.
대통령직인수위원회가 활동을 개시하는 정권 교체기여서 관가는 들뜬 분위기에 휩싸여 있었으나 국세청은 당장 1월25일로 닥친 97년 2기 부가가치세 확정신고 업무를 앞두고 숨 돌릴 틈도 없었다. 98년 어려운 경제사정과 경기 부진이 예상됐기 때문에 연초부터 국가재정수입 조달에도 비상이 걸렸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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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8년2월25일 김대중 대통령이 취임했다. 김대중 대통령은 취임 초기 정부 주요 정책을 ‘IMF 극복’에 초점을 맞췄다. 그해 3월 9일에는 이건춘 당시 서울지방국세청장이 ‘국민의 정부’ 첫 국세청장에 임명됐다. 사진은 98년3월9일 제11대 국세청장에 임명된 이건춘 국세청장이 취임식을 하고 있는 모습. <세정신문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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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청 부과국의 역할은 과연 무엇인가?
본청 간세국의 경우와는 달리 지방청 간세국장 자리에 앉고 보니 지방청 간세국은 막상 본청과 일선 세무서의 중간에 끼여서 본청의 지시를 다시 재전달하고 일선 업무집행을 관리·감독하는 일 외에는 별로 주도적으로 하는 일이 없었다. 지방청 조사국을 제외하고는 직세국, 재산세국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98년 1월 부가가치세 확정 신고기간 동안에 나는 서울청 산하 일선 세무서를 부지런히 방문했다.
여러 세무서를 방문하다보니 독창적인 아이디어로 세무서를 운영하는 서장 또는 과장을 만날 수 있었다. 무언가 열심히 하는 사람은 하고 싶은 이야기를 계속하려고 했으나 무사안일한 자세로 일하는 관리자는 할 말이 없어 빨리 내가 떠나기만 기다리는 듯한 태도를 읽을 수 있었다.
당시 서초세무서 조용옥 서장은 여러가지 참신한 아이디어로 본인이 친히 취약분야 세원관리 모델을 개발해 유용하게 잘 활용하고 있었다.
나는 국세청이 바로 이런 사람을 발탁해 써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삼성세무서에서는 부가세 신고서를 접수해 놓고 신규사업자 중에서 수입금액이 업종으로 봐 과다하게 많은데도 인건비 원천징수가 없는 사업자를 자료상 혐의자로 보고 지체없이 추적해 성과를 내고 있었다.
남산세무서 정준영 서장도 관내 집단상가 점포 관리를 좀더 공평하게 하기 위해 야간과 새벽시장 점포별 판매 상황까지를 확인·관찰하는 열정으로 일했다.
‘착하고 충성된 일꾼’이란 바로 이런 사람들을 일컫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본청 부가가치세 행정에서 떠난지 만 2년이 지난 후 서울청 간세국에 와서 보니 부가가치세 행정은 아직 크게 달라진 것이 없었다.
여전히 무자료거래와 자료상에 대한 별다른 대처방안이 없었고 신용카드 영수증 활성화도 아직은 미흡한 실정이었다.
나의 학위 논문에서 내가 제안한 3대 경제주체별 과세자료 산출체계를 온전히 제도화하지 않는 한 투명한 과세자료 양성화는 아직 기대할 수 없었다.
서울청 간세국장으로 그대로 남다
98년2월25일 김대중(金大中) 대통령 당선자가 제15대 대한민국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그리고 3월9일 당시 이건춘(李建春) 서울청장이 새 국세청장에 임명됐다.
이 청장은 3월16일에 국장급 인사를 단행하였는데 모두가 자리를 옮겼으나 나는 그대로 유임됐다. 본청과 서울청 주요 보직에는 행시 후배들이 포진했다.
꼭 문이 열려야 할 절체절명의 시기에 나의 방문만 그대로 닫혀 있는 형국이었다.
여기서 나의 공직생활을 접으라는 뜻인가 마음 속으로 많이 고민했다.
아무 말 없이 나 자신의 지나간 공직의 순간순간을 되돌아보며 성찰하는 가운데 이 어려운 시기를 내 신앙의 힘으로 버텨냈다.
그러나 사람의 일을 누가 알 수 있었으랴. 이번에 발령이 나지 않은 것이 오히려 뒤에 더 좋은 일로 연결되리라고 그땐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3. 본청 재산세국장 3개월
독수리 날개 치며 올라가듯이
98년4월1일 나는 본청 재산세국장으로 부임했다.
그해 3월16일 국장급 인사이동에서 나 혼자만 서울청 간세국장 자리에 그대로 유임됐는데 불과 2주일 후에 본청 성희웅(成熙雄) 재산세국장이 자의로 사직함에 따라 내가 그 자리를 이어받게 됐다.
이처럼 나에 대한 인사가 뒤늦게 이뤄짐으로써 내가 가고 싶지 않았던 본청 간세국장 자리를 피하게 되었고, 그해 5월 이사관(2급)으로 자동 승진할 수도 있게 됐다.
그동안 나를 짓누르고 있던 무겁고 암울한 바위 덩어리가 일시에 사라져 없어지고 온몸과 마음이 독수리 날개 치며 힘차게 창공을 차고 올라감과 같이 기운이 솟고 정신이 쇄락했다.
<계속>-매주 月·木 연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