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개월만에 좌천당하다
당시 명동 일대를 관할하는 중부세무서는 명동성당 부근인 지금의 남대문세무서 바로 그 자리에 을지로세무서와 함께 위치하고 있었다.
낭만이 깃든 명동지역에서 일하다 보니 젊은 기분에 왠지 모르게 세상이 온통 필자 중심인 것 같은 착각이 들기도 했다.
퇴근후면 죽마고우들과 함께 명동길을 거닐고, 빈대떡에 막걸리를 기울이면서 필자가 목표로 하는 주경야독의 생활을 멀리 하고 젊음을 만끽하려고만 애썼다. 무엇보다 필자가 열심히 하던 신앙생활도 자연히 멀리하게 되자 정신적으로 점점 메말라가고 있음을 느꼈으며 왠지 모르게 불안감을 떨칠 수가 없었다. 지금 곰곰이 생각해 보면 필자가 믿는 신께서 그 때 가만두지 않으시고 간섭하셨던 것 같다.
얼마 후에 일어난 일이지만 중부세무서로 간지 8개월만인 70년 2월에 국세청 기구가 크게 바뀌었다.
이전까지는 서울시내 세무서는 모두 서울지방국세청 관할이었지만 그 절반을 중부지방국세청 관할로 넘겼으며 반면 경기도와 인천시를 서울청으로 편입시킨 것이다.
그런데 필자는 전입된지 불과 몇개월 밖에 되지 않아서 중부지방국세청 관할인 중부세무서에 계속 남아있는 것으로 알고 있었으나 체납성적이 다른 직원들에 비해 저조하다는 이유로 인사이동 대상이 된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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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용근 천암함재단이사장이 2013년4월25일 충남 계룡대에서 열린 3군 본부 합동아카데미에서 ‘대한민국 안보역량 강화의 힘-근자열!’이란 주제로 특강을 가졌다. <조용근 이사장이 육해공군 장성 700여명 앞에서 강연하고 있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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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70% 이상을 넘겼기 때문에 설마하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전 직원 중 끝에서 세번째이니 지방청에 가서 잘 이야기해 놓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선배님의 조언을 듣고 짬을 내어 지방청 체납 세금 담당과장님을 소개받아 면담신청을 했다.
그 분은 당시 ‘체납세금의 귀재’라고 불릴 정도로 유명한 분이셨다. 대뜸 찾아가서 큰 절을 올리고 말씀드렸다. 소개해 준 선배님이 잘 이야기해 둬서인지는 몰라도 외모와는 달리 빙그레 웃기만 하시던 그 과장님께서는 “자네 성적은 다른 세무서에서는 우수자에 해당하네. 시골로 안가게 될 테니 걱정하지 말게나. 다만 서울시내 다른 세무서로는 가야 할 거야.”
시골로 안 가게 되었다는 말씀에 무조건 감사하다는 인사를 하고 자리를 떠나면서 마음 한편으로는 섭섭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얼마 안 있으면 낭만과 젊음이 있는 이 명동 땅을 떠나야 한다니….
참고로 오랜 세월이 지난 후 필자가 한국세무사회장에 출마를 하게 되었을 때 그 과장님께서 명퇴를 하시고 세무사로 활동하고 계셨는데 옛날에 필자를 잘 배려해 주었으니 세무사회장에 당선되면 자기를 잊지 말라고 하시면서 크게 응원해 주셨던 참 고마운 분이셨다. 지금도 고맙게 생각한다.
“최 선배님! 오래오래 건강하게 사세요!”
드디어 70년 2월, 용산구 후암동에 있는 용산세무서 개인세과로 발령을 받았다. 8개월 동안의 짧은 중부세무서 재직 중에 형의 죽음으로 부모님을 서울에서 모시게 되었으며 죽마고우들과 함께 명동에서 나름대로 젊음을 즐기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희한한 인연으로 맺어진 오 과장님과의 동거 아닌 동거(?)를 하면서 조금씩 사회물정을 익혀가게 되었다.
그때 필자는 “아! 지금 내가 체험하고 있는 일들이 예사 일이 아니구나! 누군가의 큰 힘에 의해 메마른 이 광야길에서 단련을 받아가는 23세의 말단 세금쟁이구나”하고 생각했다.
따라서 내가 누리고 있는 젊음의 순간들은 이 잠깐의 시간으로 충분하다는 그 분의 뜻에 따라 살아야겠다고 느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불안감을 감출 수가 없었다. 세번째 근무지인 용산세무서에서는 또 어떤 사건과 연단이 필자를 기다리고 있을지?
<계속>-매주 水·金 연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