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법학교수들의 자조 섞인 말 가운데 이런 것이 있다. 자기는 법조문 해석 기술자를 가르치는 선생이라는 것이다. 이는 제법 총기가 있는 제자들을 열심히 가르쳐 놓았더니, 기껏해야 법전을 열심히 뒤져서 고객의 입맛에 맡도록 해석하는 '법조문 해석 기술자'가 돼서 자기 잇속이나 챙기는 평범한 사람이 되고 말았다는 실망감에 따른 표현이다. 이게 어디 법학만의 문제일까. 회계학이나 세무학도 유사할 것이다. 공인회계사나 세무사 자격증을 취득한 후 분식회계나 하는 '장부 제조 기술자'를 바라보는 교수의 심정도 법학 교수와 유사하다. 물론 극히 일부 변호사나 공인회계사 등이 그렇다는 것이다.
2. 이들의 주된 '작업의 무대'는 국세기본법 제14조에 규정된 실질과세원칙이다. 해당 조문을 읽어보면 그 내용이 선언적이나 추상적인 단어로 구성돼 있다. 따라서 납세자가 과세관청 모두 '자기 논에 물대는 식'으로 해석한다. 납세자와 법조문 해석 기술자들의 주장 근거 핵심은 법적 안정성이다. 대한민국은 법치주의 국가이므로 세법의 적용과 해석도 민법과 상법 등에 따라서 성립된 계약을 무시할 수 없고, 그 계약에 따라 과세소득을 계산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여 원래의 거래당사자 사이에 제3자를 개입시켜서 특수관계를 회피하고, 이에 따라 부당행위계산부인이나 제2차 납세의무 등의 규정을 면할 수 있다. 또한 과세요건명확주의라는 것을 들고 나와서 세법상 명확하지 아니한 용어를 교묘하게 비틀어 해석하기도 한다. 某 재벌기업이 후계자에게 저가의 신주인수권부 사채를 발행해 증여세를 포탈한 것이 그 예이다.
한편, 국제거래도 그 사정은 더 심했으면 심했지 덜하지는 않다. 애써 조세피난처에 페이퍼컴퍼니를 만들어서 이전가격세제의 적용을 회피하는 것은 이젠 진부한 경우에 속한다. 국내 시중은행의 주식을 사고 팔아서 거대한 이익을 얻었던 외국 투기자본이 좋은 예일 것이다.
3. 이와 같은 납세자의 공격적인 조세회피행위에 대해, 과세관청은 조세공평부담이라는 전가의 보도를 사용한다. 법적 실질보다는 무리하게 경제적 실질을 강조하는 경우도 많다. 이와 같은 분쟁이 소송에 이어지면, 납세자는 거래형태 선택 자유 및 절세권 보장이라는 구실을 내세워 그 정당하다고 하고, 거기에 법적 안정성이라는 구실을 그럴듯하게 붙여서 대법원에서 승소판결을 받아낸 경우도 적지 않았다. 반면 관청은, 눈에 훤히 보이는 조세회피나 탈세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목전에서 몇십억원, 몇백억원, 몇천억원이 포탈되는 현실을 목도하고도 법조문(法條文)이 명쾌하지 못해서 눈뜨고 당한 것이 부지기수였다.
4. 그런데 최근 이와 같은 논란을 일시에 잠재울 대법원 전원합의체 결정이 있었다(대법 2008주 8499, 2012.1.19 선고). 이 사건은 외국기업 A가 국내에서 과점주주의 지위를 회피하기 위해 국내에 자회사(B, C)를 만들어서 이들을 각각 100% 지분을 소유하고, 이들 B, C는 내국법인 '갑'의 지분을 50%씩 소유하도록 Tax Planning한 것이다. 세법상 과점주주가 되기 위한 조건은 <50%+1주>이다. 만일 A가 직접 내국법인 갑의 지분을 100% 소유했다면 과점주주가 되지만, A의 자회사인 B와 C가 각각 50% 소유한 경우라면 형식적으로는 과점주주가 아닌 것이다. 50%에 1주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과세관청은 B와 C는 형식상 회사라고 해서 세법상 이들의 법인격을 부인하고 난 뒤, A가 내국법인 갑의 주식을 100% 소유했다고 판정하고 A에 대해 내국법인 갑의 과점주주라고 판단해서 세법상 납세의무를 부여했었다.
5. 이에 대해 해당 납세자는 법적안정성을 내세워 소송을 제기했다. 종전 같았으면 사법부가 납세자의 손을 들어줄 것 같았으나, 금지금사건, 외국투기자본의 시중은행 주식 양도 등에 대한 논란을 지켜본 대법원이 안 되겠다 싶었다고 판단했는지 해당 사건을 대법원 전원합의체에 넘겼고, 여기서 납세자의 법적 안정성 대신에 과세관청의 조세공평부담원칙의 손을 들어준 것이다. 뒤돌아보면 이 판결이 조금만 일찍 나왔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이전의 대형 탈세사건에 대한 대법원 판결 중 상당수는 이번 대법원 전원합의체 결정에 반하기 때문이다. 하여, 다시금 근본적인 문제를 생각해 본다. 법적 안정성? 매우 중요한 개념이다. 하지만, 누굴 위한 법적 안정성일까? 공격적인 조세회피나 탈세를 일삼는 납세자에게까지도 적용돼야 할까? 아닐 것이다. 법이 왜 존재해야 하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을 스스로 답을 해 볼 필요가 있다.
6. 그렇다면 납세자의 법적 안정과 과세관청의 조세공평부담의 갈등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가장 좋은 방법은 이른바 Safe Harbour Rule을 만드는 것이다. 다시 말해 납세자의 법적 안정성을 위해 선택한 대안에 따른 세액과 과세관청의 조세공평부담원칙에 따른 세액과의 차이가 일정 비율 이하이거나 일정금액 이하일 경우에는 납세자의 Tax Planning에 대해 실질과세원칙을 적극적으로 적용하지 않는 방법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현행 세법상으로도 30% 룰이 적용되는 경우가 있다. 현행 소득세법에서는 사업자가 특수관계인이 아닌 자에게 자산을 정상가액보다 낮은 가액으로 양도하거나 높은 가격으로 매입한 경우 이를 증여한 것으로 보되 정상가액을 기준으로 30% 이내의 가격으로 거래한 것은 묵인하고 있는 것이 좋은 예이다.
7. 실질과세원칙은 성실한 납세자를 우대하고 불성실한 납세자에 대해 제재를 하자는 것이다. 불성실한 납세자에 대해서는 입증책임을 지울 필요가 있다. 반면 성실한 납세자에 대해서는 세법이 탄력적으로 적용될 필요가 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이번 대법원의 판결은, 만시지탄이지만, 실질과세원칙의 정상적인 운영을 위해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고 본다. 사족이지만, 某 대법관의 다수의견에 대한 보충의견이 시선을 끈다. 실질과세원칙은 '개별과세규정의 형식성에서 생기는 부당함과 불공정을 다른 차원에서 시정하고자 하는 것이고 따라서 실질의 존부를 판단하는 기준을 일의적으로 또는 개별적으로 구체화해 규정할 수 있다면 법률이 구태여 실질과세원칙이라는 일반 규정을 따로 마련해 선언해 둘 이유가 없다'고 쓰고 있다. 탁월한 판단이다. 머리가 명석할 필요가 있음을 일깨워 준 판결이다. 반면 법적안정성 및 과세요건 명확주의의 깊은 뜻을 헤아리지 못하고 자기의 목적을 위해 아전인수식 해석을 했던 사람들에게는 큰 경종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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