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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독하기 2025.07.04. (금)

포퓰리즘과 재정건전성

우명동 성신여대 교수

최근 우리 사회 일각에서는 포퓰리즘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다. 나라에 할 일이 많고 수입은 제한돼 있는데 일반 대중들의 인기에 영합하는 포퓰리즘 정책은 재정건전성을 위협해 망국으로 가는 길이라는 것이 그러한 정책을 반대하는 주된 논거로 보인다. 기획재정부장관은 취임식에서 "복지 포퓰리즘에 맞서 레오니다스(페르시아군에 맞서 싸운 스파르타의 왕)가 이끌던 300명의 최정예 전사처럼 (재정을) 굳건히 지켜야 한다"며 반 포퓰리즘의 전의(?)를 표명하기도 했다. 반면 그러한 정책에 우호적 견해를 표명한 여당의 한 중진 정치인에게는 "좌익세력의 공짜밥 공세에 맥없이 굴복하기도 했다"라는 비난이 돌아가기도 하였다. 

 

도대체 '포퓰리즘'이란 것이 무엇이길래 당정의 고위인사들이 이토록 극단적인 수사를 써가면서 반대하고 나서는 것일까? 사전적 의미를 보면 '대중적인 인기, 비현실적인 선심성 정책을 내세워 일반 대중을 호도해 지지도를 이끌어내고 대중을 동원시켜 권력을 유지하거나 쟁취하려는 정치형태'를 지칭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 정책은 달리 '대중주의'라고도 하며, 인기영합주의·대중영합주의라 불리기도 한다. 경제정책면에서는 정치적인 목적으로 일반대중, 저소득계층, 중소기업 등의 지지를 확보하기 위해 취하는 일련의 경제정책을 지칭하곤 한다. 위의 정의대로라면 이 정책은 '비현실적인 선심성 정책으로 일반 대중을 호도'하는 말하자면 미끼를 던져서 시민들을 속이는 정책이라는 뜻이니 잘못된 정책임이 분명해 보인다. 그러나 조금만 달리 생각해 보면 공공정책을 수행함에 있어서 일반 시민들의 의견을 좇지 않으면 무엇을 좇으란 말인가. 일부 엘리트의 의견을 좇으라는 말인가? 그러면 좋은 사회가 된다는 보장이 있는가? 그렇다 치더라도 그 경우 누구를 위해 좋은 사회가 된다는 것인가? 일찍이 플라톤은 현명한 군주에 의한 철인정치가 이상국가를 가져옴을 설파한 적이 있으나, 현명한 철인을 누가 어떻게 찾는단 말인가? 논리적으로는 몰라도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하거나 시행착오를 통한 비용이 너무 클 것은 명약관화한 일이다. 그래서 우리 인류는 현실의 삶 속에서 '대의제 민주주의'라는 대안을 만들어 발전시켜 온 것이 아닌가. 그렇게 대의제 민주주의 제도적 틀을 만들어 우리들의 삶을 총괄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위정자들은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고 키워 나가는데 몰두한 나머지 대다수 시민들의 의견에 반하는 정책을 무모하게 시행해 나가는 경우를 적잖이 볼 수 있다. 문제는 이 단계에서 발생한 것으로 보인다. 말하자면 시민들의 의견에 반하면서 자신들의 권력에 기여하는 정책을 '시민들의 이름으로' 밀고 나간다는데 있다. 이러한 사실을 경험한 인류는 다시금 대의제 민주주의 틀 속에서도 주민들의 항상적인 '참여'를 제도적으로 보장함으로써 그들의 진정한 의견을 반영해 대의제 민주주의의 오류를 줄여가는 지혜를 발휘해 오고 있는 것이다.

 

세출 규모는 계속 늘어만 가는데도 세수는 좀처럼 늘어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그런 데도 신용카드 소득공제제도를 폐지하자든가 소득세 최고한계세율을 낮추자는 주장을 포퓰리즘이라 공격하는 사람은 없다. 더구나 요즈음 특히 이슈가 되고 있는 법인세율 인하 등 기업감세를 유지해야 된다는 주장을 포퓰리즘이라 공격하는 사람도 없다. 재산관련세 부담을 낮추자 해도 포퓰리즘이라 반박하는 사람은 없다. 산업투자 지출을 늘리자든가 대규모 토목공사를 추진한다 해도 포퓰리즘이라 막아서는 사람은 없다. 오로지 소비세를 낮추자든가 복지지출을 늘리자 하면 포퓰리즘 때문에 재정건전성이 위협받는다고 전열을 가다듬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온다. 반 포퓰리즘의 이해가 어디에 닿아 있는지를 인식하는 것은 그리 어려워 보이지 않는다.  

 

물론 표출된 주민들의 견해가 모두 진정한 주민의 견해가 아닐 수 있다. 때로는 그것이 또다른 정치가들에 의해 만들어진 왜곡된 견해일 수 있다. 그렇다고 주민들의 의견을 좇는 것을 두고 일방적으로 포퓰리즘이라 치부해 버리면 위정자들의 존재가치는 어디서 찾아야 하는 것인가? 문제는 어떻게 하면 주민들의 잠재된 진정한 견해가 표출되게 할 것인지를 고민하는데 두어져야 할 것이다. 재정건전성은 엘리트나 일부 권력집단의 머릿속에서 찾아질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주민들의 생활상의 건전성에서 찾아져야 할 것이다. 대의적 민주제 하에서도 위정자들의 정치적 입장이 주민들에게 전달되고 주민들의 의견이 다시금 정책결정과정에 환류되는, 주민의 참여에 의해 통제되고 관리되는 사회의 중요성이 새삼 커보이는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본면의 외부기고는 本紙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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