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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독하기 2025.06.24. (화)

죄악세(sin tax) 논란에 대한 일고

필자는 달포전에 정책토론회 주제발표를 통해 주류 및 담배관련 소비세 체계에 대한 개편방향을 발표한 바 있다. 음주와 흡연의 사회적 비용이 연간 수십조원에 이를 정도로 크기 때문에 음주와 흡연을 감축하기 위한 노력이 절실하고 그런 노력의 일환으로 관련 소비세 체계도 개편이 필요하다는 것이 논의의 핵심이었다. 보다 구체적으로는, 우리가 지향하고 있는 복지선진국들과 비교해봤을 때, 술·담배의 가격은 최저수준인 반면 성인 1인당 음주·흡연량은 최고수준에 이를 만큼 문제가 심각하는 점에 근거하고 있다.

 

그런데 불행히도 필자의 주장은 채 논문을 정책토론회에서 발표하기 몇시간 전에 각종 언론 매체와 인터넷으로부터 뭇매를 맞고 제대로 된 토의조차 제대로 한번 못해보고 일종의 사형선고를 받기에 이르렀다. 그 핵심적 요인은 바로 '죄악세'라는 용어에서 비롯되었다.

 

'술과 담배에 대해 무슨 죄악세를 부과하느냐', '술·담배를 하면 죄인이 되느냐,' '정부는 국민들을 잠재적인 범죄자로 취급하느냐'는 식의 댓글이 인터넷과 각종 언론매체를 도배했다. 소비억제적 조세로서 술과 담배에 대한 '죄악세'적 기능의 소비세 과세를 강화해야 한다는 취지의 본문내용이 오역되면서 논란를 불러일으켰기 때문이다.

 

본래 죄악세의 원어는 'sin tax'이다. sin은 '양심의 죄,' 또는 종교적 의미의 '원죄'등을 일컫는 말이다. 일반적인 의미의 범죄, 즉 crime과는 전혀 의미와 용법이 다르다. 불행히도 우리나라 말에는 sin과 cirme을 구별할 수 있는 적당한 단어가 없다. 통상적으로 sin tax를 죄악세로 번역해 사용하고 있을 따름이었다. 그러던 차에 '죄악세'의 죄가 sin이 아닌 crime으로 잘못 해석되면서 인터넷상에서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무수히 많은 비판성 댓글들이 달리면서 '죄악세'라는 용어는 사실상 죽은 단어가 되어 버렸다.

 

sin tax라는 용어는 재정학 또는 조세론에서 전문용어로 널리 통용되는 단어였다. 주요학술 논문에서도 별다른 마찰없이 자주 사용되고 있다. 다만 재정학이라는 학문의 특성상 공공부문에서만 죄악세란 용어가 주로 사용됐을 뿐, 일상생활에서는 접하기가 쉽지 않았다. 금번의 조세체계 합리화를 위한 정책토론회를 개최하는 마당에서 엉뚱하게 화제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 본의아니게 불필요한 논란거리를 제공하게 된 점, 이 자리를 빌어 송구스럽다는 말씀 올리고자 한다. 차제에 sin tax에 대한 적절한 우리말을 찾아줄 필요가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본래 sin tax라고 하면 흔히 주세와 담배세가 많이 거론된다. 술과 담배를 많이 소비할수록 건강에 유해하다는 관점에서 그런 명칭이 붙여졌다. 기능적으로는 조세 부과를 통해 가격을 인상해 수요량을 조절(억제)하는 데 주된 목적이 있다. 흔히 술과 담배에 대한 비용이라고 하면 이들 제품을 직접 구입하는데 소요되는 비용, 즉 구입비를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그 외에도 음주·흡연에 따른 각종 외부불경제가 발생하는 만큼 추가적인 비용이 발생한다. 이런 비용을 흔히 외부비용이라고 한다.

 

일반적인 경쟁시장에서는 아무도 외부비용을 부담하지 않기 때문에 조세론에서는 조세부과를 통해 부담을 소비자가 부담하도록 해야 사회·경제적으로 바람직한 균형상태에 도달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따라서 sin tax는 외부비용 부담분을 소비자에게 부과한다는 의미에서의 부담을 의식한 것일뿐, 범죄행위에 대한 응징적 차원에서의 조세 부과와는 엄연히 다르다.

 

최근 필자가 주장했던 주세·담배세 과세 강화 방안에 대해 대부분의 여론을 보면, 서민들의 필수재임을 들어 반대의견을 제시하고 있다. 비판적인 여론에 따라 정치권에서도 술과 담배에 대한 소비세 개편논의를 더 이상 하지 않기로 결정하였다. 그런데 여기서 한가지 반문하고 싶다. 과연 정부가 책임져야 할 것은 무엇인가? 생필품을 싸게, 그리고 안정적으로 서민들에게 공급하는 데 있는 것인가? 아니면 술과 담배를 싸게 서민들에게 공급해주는 것이 정부의 의무이자 책임인 것인가? 대답은 자명하다. 당장 쓰리고 아프더라도 미래를 위해 용단이 필요하다면 당장의 아픔을 참아낼 용기가 현재 우리에게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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