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 작년(2008년)의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집회의 1주년을 기념한다는 시위가 경찰의 원천봉쇄로 충돌하면서 'Hi Seoul'축제가 시작되던 서울광장의 무대를 엉망으로 만들었다는 소식을 듣고 많은 국민들은 크게 놀라고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작년 새 정부의 출범 직후 두달 가량을 저녁마다 촛불시위대가 도심을 누비면서 공권력의 마비, 국제적 이미지의 실추, 언론의 소통문제 등으로 심각한 후유증을 남겼고 이제 겨우 진정되고 있는 듯 싶었더니 다시 촛불시위라니.
여기서 가끔 연극무대나 텔레비전 등에서 보던 각설이(품바)타령의 '얼씨구 씨구 씨구…작년에 왔던 각설이가 죽지도 않고 또 왔네'란 문구가 떠올랐다.
각설이 타령은 원래 그 유래(통일신라시대)가 깊다고 한다.
음지에 사는 계층(거지, 장돌뱅이 등으로 위장)들이 나름대로의 메시지를 야유, 풍자, 해학, 허무, 웃음 등으로 포장해 세상(양지)사람들에게 전달하는 민족 문학적 재치가 물씬한 노래(동작과 함께)의 한 장르였다.
각설이(覺說理)라고 하여 깨닮음을 대중화하기 의해 만들어낸 노랫말과 그 가락에 상대방(청중)이 공감하고 감사해 음식 등을 공양(供養)했다는데 그후 구걸하는 형식만이 남아 품격이 달라졌다고 한다.
아무튼 각설이꾼들을 보고 그 타령을 들으면 그 얼굴 분장, 복장, 동작 등이 재미있고 그 노랫말들은 저절로 웃음짓게 만든다.
그런데 엊그제 돌아온 촛불시위대들은 얼굴에 마스크를 하고 살벌한 표정에 손에는 각목, 쇠파이프를 들고 '독재 타도'를 외치며 '촛불이 승리한다. 촛불아 모여라' 하는 구호를 앞세우고 발호하고 있는 그 모습들을 보면서 모두들 허탈과 참담함을 느꼈을 것이다.
작년 이맘때 공영방송과 일부 인터넷의 선도로 너무도 잘못 알려진 진실, 그래서 순수해야 할 촛불시위를 처음부터 너무 엉뚱한 방향으로 끌고 간 일부 불순세력들의 실체가 드러났고 미국산 쇠고기는 시장원리에 따라 평가돼 유통되는 등 모든 것이 정상적으로 돌아간 것이다.
엉뚱한 사단(事端)으로 온통 나라를 뒤집어 놓았던 그 꾼들이 무슨 염치로 1년을 기념한답시고 각설이 타령의 그 말처럼 '죽지도 않고' 또 왔단 말인가.
1천명 내외(그들은 더 많다고 주장)의 꾼들이 이제 국제 문화도시로의 도약을 기약하는 우리 대서울의 1천만 시민의 잔치를 뒤집어 놓았으니 무슨 논리라도 '천만(千萬)의 말씀'이 아닐 수 없고 '천부당(千不當)만부당(萬不當)'한 일이다.
그들의 단골 구호, 그러니까 그 꾼들이 입만 벌리면 주장(타령)하는 각설(却說)이 '반독재' '민주' '자유'라면서 그들의 하는 짓들은 반민주·불법투성이고 전혀 책임을 지지 않는 자유라는 비판을 받고 있다.
금년은 주지하다시피 찰스 다윈의 출생 200주년을 기념하면서 그의 불세출의 저서 '종의 기원'의 핵심원리 '적자생존(適者生存, Survival of the fittest)'이 전세계 국가, 기업들이 경제위기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지혜를 시사하고 있다.
그런데 그 적자생존의 의미를 여러가지로 확대 적용할 수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적자생존(赤者生存)이 아닐까 한다.
그동안 음지에서 실력을 키우던 진보(進步)를 명분으로한 NGO단체들 중 일부 친북·공산주의 성향의 세력들(赤者로 구분)이 지난 두번의 정권 10년 동안에는 양지에서 영양분(예산 등)을 섭취하고 지내다가 전혀 성격을 달리 하는 정부에서 생존투쟁을 벌리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새 정부의 틈(허점)을 발견해 촛불시위를 필두로 용산시위 그리고 여의도로 달려가 판(장)을 벌리고 그들 나름의 각설이 타령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제는 예전의 이론투쟁은 사라지고 살아남기 위한 밥그릇 투쟁이라고 판단하면 국면(局面)의 이해가 간단해진다고 전문가들은 단언하고 있다.
60∼70년대의 일본의 적군파(赤軍派-소수로 몰려 외국으로 나가 자멸)들처럼 언젠가 소멸되리라 기대하고 있지만 이 꾼들의 판에서 부회뇌동하거나 박수를 보내고 있는 아직도 많은 순진한 관중들이 걱정스러운 것이다
지역, 재산, 소득, 직업 등으로 계층을 만들고 양극화되면서 깊은 불신의 골이 깊어지고 있는 것을 빌미삼아 이들은 기회만 있으면 판을 아예 덮으려고 기승을 부리고 있으니 기가 막히는 일이다.
사회 각 계층이 원만한 소통(疏通)으로 신뢰회복을 이루는 데는 시간이 소요되는 것이지만 모두가 꾸준히 지속적으로 노력해야 한다.
정부가 투명하게 모든 계층을 공평하게 품고 가는 정책을 추진하고 보수라고 불리는 사회지도층도 얼마간의 양보를 하면서 화합을 위한 목소리와 행동을 보이는 그런 확고하고 정리된 체제라야 그 반갑지 않은 각설이들의 되풀이 등장을 막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