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 Millennium 2000년을 맞이하면서
서울청 조사국에 근무하고 있는 J사무관이 점심을 먹잔다.
이번 사무관 인사에서 내가 있는 본청 납세홍보과 계장으로 오고 싶다고 했다. 아무래도 본청에 와야 승진의 기회가 더 많을 거라면서.
나는 평소 J의 능력과 사람됨됨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 자리에서 승낙을 했다.
본청 전입자 명단에 그를 적어 인사계로 보냈다.
잠시후 J가 있는 국의 W국장에게서 전화가 왔다.
"당신은 국장 허락도 없이 누구 맘대로 남의 직원을 빼내가!"
어째 말하는 투가 몹시 불쾌하다.
목에 잔뜩 힘이 들어가 있는 목소리였다.
"내가 당신 부하요? 허락을 받게, J에게 물어보시오"하고 전화를 끊어버렸다.
그리고 J를 불렀다.
"희망을 했으면 그쪽에는 당신이 말이 없도록 해야지 무슨 놈의 경우가 이런 경우가 다 있어요?"
"그리고 내가 당신 국장에게 왜 허락을 받아야 되요?"
J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본청 전입명단에서 제외를 시켜달라고 사정을 하고 내려갔다.
나는 다른 희망자로 바꿨지만 그런 사실을 알려주지 않았다.
W국장 밑에 있던 P과장이 전화로 국장이 잔뜩 화가 나 있다고 한다. 그리고는 요즘 실세(實勢)이니 좋지 않은 관계가 되면 신상에 이로울 것이 없단다.
그래서 나보고 와서 사과하는 게 좋을 것 같다고 한다.
웃기고 있네. 실세가 뭔데?
권력있는 놈도 실세(實勢)고 떨어진 놈도 실세(失勢)여!
나 그런 거 겁낼 놈이 아니다.
그런 일이 있었다.
'99년12월31일 종무식이 끝나고 사무실 책상 앞에 앉아 21세기가 되면 세상이 확 바뀌는 것처럼 오두방정을 떨고 있는 방송을 들으면서 '2000년도에는 승진 노력을 해보나? 그만두나?' 무슨 결단을 내려야겠다고 나름대로 고민을 하고 있었다.
나는 결정을 못 내리고 이런저런 생각에 갈등을 하고 있었다.
그래, 그것은 21C 내년에 가서 결정하면 된다고 미뤄버렸다.
우선은 올해의 마지막을 잘 보내야겠다는 생각에 '99년도 내가 직장에서 잘한 게 무엇이고 잘못한 게 무엇인지를 반성해 봤다.
딱 하나 걸리는 게 있었다. W국장이다.
나는 한사람이라도 언짢은 관계를 유지한 채로 21세기를 맞이하기가 싫었다. 나는 그에게 찾아갔다. 반갑게 맞아줬다.
부속실 여직원이 커피를 가져왔다.
"나는 힘도 없고 빽도 없어서 인사계 같은 데를 못 가봐서 인사를 잘 모르지만 상식적으로 소속국장의 허락을 받아야 직원을 데려가는 것 아니오?"
계급장이 높아 아랫것들을 다그치듯 어째하는 말투가 좀 빼딱하고 시비조다. 이런 말 듣고 내가 가만히 있으면 내가 아니다.
"잘 모르면 배우시오. 본청에서 직원 데려가는데 하부기관에 허락을 왜 받아요?"
"당신 지금 사과하러 온 것이 맞소?"
"내가 왜 당신에게 사과를 해요? 그럼 당신은 일선 서의 직원을 조사국으로 데려올 때 세무서장 허락 받소?"
"이것 봐라?"
"뭘 이것 봐라요?"
웃기고 있네. 실세가 뭔데?
권력 있는 놈도 실세(實勢)고 떨어진 놈도 실세(失勢)여!
나 그런 거 겁낼 놈이 아니다.
"…"
"이봐요! W국장! 지금 정권이 바뀌었다고 눈에 보이는 게 없소?!"
꽉 쏘아주고 올라와 버렸다.
결국, 21세기를 깨끗하게 맞이하려는 나의 시도는 실패였다.
둘다 현직을 떠나서 오랜만에 그와 나는 골프장에서 우연히 만났다. 옛정이 깊이든 것일까? 무척 반가웠다.
나중에 술 한잔 꼭 해야겠다고 맘먹었다.
현직에 있는 여러분들! 인생은 새옹지마(塞翁之馬)여!
높이 올라간 자리는 금방 비워 줘야 한다는 진리를 우리 모두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어느 청장님에게 이런 말씀을 드렸던 기억이 난다.
"청장님은 직급별로 목에 힘을 주시는 강도가 달라보입니다."
"무슨 소리야!"
"서기관 때는 정면을 바라보셨고, 이사관 때는 언덕을, 1급 때는 높은 산을, 청장 때는 하늘만 쳐다보는 것 같습니다."
"…그래?"
"직급만 달라졌을 뿐 사람은 그대로인데 디스크가 걸리지 않은 한 목이 변하면 되겠습니까?"
얼마전에 높이 올라가 있는 J, H, 그리고 K형과 골프를 치고 돌아오는 차안에서 K형이 이런 충고를 한다.
"박형은 그게 탈이야!"
"공치면서 그분들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면 기분 나빠하잖아!"
나는 이렇게 대답해줬다.
"기분 나쁘게 생각한다면 그는 친구가 못되요!"
"그럼 안보면 될 게 아니요?"
"비록 그가 대통령이 된다 해도 주위의 누군가는 그의 이름을 불러주는 사람이 있어야 그게 참 인간이요!"
"이름은 불러라고 지어 놓은 것 아닙니까?"
직급이 변했다고 어느 날 갑자기 온 세상이 마치 자기 것인양 거들먹거리며 신체구조에 이상을 나타내는 사람에게 나는 송(宋)나라 유학자 '정이천(程伊川)'의 이런 말을 들려주고 싶다.
사람에게는 세가지 불행이 있는데 첫째는, 젊어 고관(高官)에 오르는 것이요 둘째는, 부형(父兄)의 후광으로 미관(美官)에 오르는 것이며 셋째는, 재주 많고 문장에 능한 것이라 했습니다.
우리는 인생의 승자로 살아오면서 패자의 쓰라림을 외면한 적이 없습니까? 과거 성공에 도취돼 미래의 성공에 젖어 있는 적이 없습니까? 윗사람에게 총애를 받는다고 동료나 선배들에게 교만한 적이 없습니까?
출세를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위인들이 아직도 많다. 그런 사람 높이 올라가면 나라와 백성에게 큰일을 저지른다.
올라갈수록 아래로 머리를 숙이는 잘 익은 '벼'가 되어야지 한심한 '해바라기'가 되어서야 쓰것습니까?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