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읍내에 있는 음식점이나 주점(酒店)에는 밤늦게까지 손님이 북적거리고 병석(病席)에 누운 정막동의 삼간 초가집에도 후보자들과 운동원이 찾아들고 지면(知面)이 있는 고물상 김 사장은 세번이나 찾아와서 "자네만 믿네" 하는 소리를 되풀이하면서 '꾸벅 큰 절까지 하며' 지지를 호소했다. 순박하고 얼뜬 그에게는 마치 길가에 파과(破鍋=깨진 냄비) 앞에 놓고 손을 벌리고 앉아 있는 '장님'을 볼 때처럼 가엾고 측은했다.
투표일을 하루 앞두고 정막동의 그 조그만 골목안 집에 낯모를 부인이 찾아왔다. 반짝반짝한 가죽(毛皮)코트에 고급 자가용을 탄 중년 부인(中年 婦人)이었다.
같이 따라온 이발소 주인 성가의 말이 "이곳 태생으로 서울에서 큰 회사를 차리고 있는 이某 사장의 부인인데 그 이 사장님이 이번에 △△당 공천으로 출마를 했다"는 것이었다.
"당은 다르지만 뭘로 보나 그 분밖에 없다"면서 그 부인 앞에서 전에 그 밑에서 일했던 고물상 김 사장의 험담(險談=욕)까지 늘어놓았다. 그 이 사장 부인은 돌아가면서 '하얀 두툼한 봉투 하나'를 땀내나는 정막동이 깔고 있는 헌 누더기 요밑에 밀어넣고 "잘 부탁해요"하면서 한 손을 들어보이고 나갔다. 그리고 문밖에서 내바람나간 그 집 마누라 손을 가볍게 움켜쥐고 다정하게 '귓속말'을 해주고 차에 올랐다.
그런데 그날 석양부터 정막동의 병세(病勢)가 악화돼 날이 새어 투표일이 됐으나 신열(身熱)은 내리질 않았다.
찬바람은 불고 영 내키지 않았지만 고물상 김 사장의 간절한 부탁도 있고 이 사장 부인에게 '돈봉투'까지 받고 나니 투표소에 얼굴을 내비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자기 표는 이사장에게 주고 마누라에게는 고물상 김 사장을 찍도록 이르고 막 투표장에 들어가려는데 누가 등뒤에서 그 손을 꼭 움켜잡았다. 읍내에 사는 종씨(宗氏) 정약국 주인이었다.
정약국은 그를 집 모퉁이로 끌고 가서 "신모에게 꼭 찍어달라"고 신신부탁을 하는 것이었다. 평소에 은고(恩顧=은혜로 돌봐줌)가 있는 종씨의 부탁을 거절할 수가 없었다.
정막동은 '흰봉투'를 뇌리(腦裡=생각하는 머리속)에서 몰아내고 눈을 질끈 감고 신모씨의 이름밑에 '붓대롱'을 꾹 눌렀다.
다음날 판명된 선거결과는 서울사는 이 사장의 압승(壓勝)으로 끝이 났다.
그로부터 며칠뒤의 일이다. 전날보다 더 화사(華奢=화려하고 사치스러움)하게 차려입은 이 사장 아니 '이 의원 사모님'이 당선인사차(?) 정막동의 집에 들렸다. 이발소 주인 성가를 '길들인 강아지'처럼 데리고….
성가는 무턱대고 고맙다는 말을 연발함으로써 자기 공(功)을 내세우려 했고 남편 말을 어기고 그 부인의 '귓속말을 믿고' 이 후보를 찍은 그 집 마누라는 그것을 알고 찾아왔다는 생각에 마음이 뿌듯했다.
그러나 '이 의원 사모님'은 전과는 사뭇 달라진 거만한 표정으로 그 집 마누라에게는 가볍게 웃어주고 병석(病席)에서 일어난 정막동에게는 흘끗 모멸(侮蔑)의 눈길을 보낼 뿐이었다.
※참고로 서울사는 李 후보의 선거공약(選擧公約)은 '선거에 당선이 되면 서울에 있는 회사(會社)를 이곳(고향)으로 옮기고 사원(社員) 전원(全員)을 이곳 사람으로 바꾸겠다'는 환심성 공약(歡心性 公約)으로,매우 괴학(乖虐=못된 장난)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