캔감자를 마대에 넣어 수십년 비어 있던 저온창고로 운반했다. 1미터 두께는 됨직한 흙벽돌 저온창고는 그 옛날 사과가 잔뜩 들어있었다. 그때 겨울은 왜 그리도 혹독했던지. 그 지독한 겨울을 저온창고에서 지내던 사과를 꺼내서 겨울 긴 밤을 잘라 먹던 사과. 지금도 사과를 볼 수 있고 먹어보지만 그맛 잊어버린지 오래다. 그런 추억이 서린 창고안에서 푸다닥 하는 소리가 들려 바라보니 박쥐가 천장에 거꾸로 매달려 대롱거리고 있다. 도둑고양이는 아까부터 담을 타며 뭔가를 노리고 있다. 사람없는 빈 집이 어느덧 그들의 천국으로 변해있다. 어쩌면 저것들이 이 집을 그나마 지켜내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
아이 바짓가랭이만한 감자 고랑 두어줄 캐고 나니 배가 고파 가져온 라면을 끓였다. 마당에서 커가는 풋고추 두어개 따서 넣고 뒷뜰 담벼락에 지천으로 자라는 들깻잎을 따서 두어장 죽죽 찢어 넣고 방금 캔 감자 대충 썰어 넣어 끓인 라면을 먹는다. 냄비 뚜껑에 라면을 올려 식혀가며 먹으니 또 옛날이 생각난다. 라면으로 버티던 그 어렵던 시절은 별로 기억하고 싶지 않건만 꼬리를 물고 달려든다. 배가 불러오자 순간 세상에 아무런 부러움이나 아쉬움도 없어지는 듯했다.
어제까지 살아온 생활을 새삼스럽게 반성하며 지켜지지도 않을 맹세 몇가지도 하며 느긋해 했다. 마당 한가운데서 편안한 마음으로 소변을 보면서 무한한 해방감에 젖어든다. 이럴때 막걸리 한사발을 해야 하는 건데 하며, 마을 앞 용산을 바라보니 재작년 죽은 동무 생각이 난다. 그 동무와는 너무 할말이 많다.
마루에서 멍하니 바라보니 마당 한 구석에 심어놓은 더덕이 저온창고 벽을 향해 더덕더덕 기어올라가고 있다. 저것은 틀림없이 몇년후 산삼이 될 것이라고 단정하고 있다. 올해 새로 심어놓은 대추나무를 감고 올라가길래 올라가지 말라고 몇번을 말렸건만 틈만 나면 대추나무를 감는 것이었다. 저 줄을 풀어줘야 하는데 하면서 앉아있다. 아직도 마굿간은 비어 있고 돼지우리 터는 지금 한창 호박줄이 시커멓게 성난 표정으로 뻗어가고 있다. 작은 방 곁에 족제비가 설치던 닭장이 있던 그곳에 우엉씨를 엉성하게 뿌려 놓고 언제쯤 잎을 딸 수 있을까를 계산해 본다.
씨앗 뿌리기와 수확하기만 해도 벅찬 나의 농활. 아무도 살지 않는 빈집 마당에 뭔가 자라지 않으면 안 된다는 강박관념. 이런 것들은 오늘날과 같은 생산성과 아이디어 창출에만 집착하는 산업·정보화 시대에서는 엉뚱할 수밖에 없겠다.
또 수확의 대가가 씨앗값만큼도 되지 않아서 채산성이 전혀 없다. 그러나 벌겋게 단 일꾼들이 땀을 흘리며 타작하던 그 넓디넓은 마당 대문쪽에 하늘에 닿을 것만 같은 짚더미가 쌓여갔으며 산처럼 그득했던 땔감 나무들과 우렁찬 소울음 소리며 온 동네를 돌아다니며 짖어대던 록구의 반가운 표정으로 앞발을 덥썩 올려놓던 그곳을 어찌 잡풀로만 덮어둘 수 있단 말인가. 그렇게 해놓고 어디서 살아간들 편히 살 수 있겠나.
넓은 줄만 알았던 마당이 손바닥만해 보이고 그 손바닥에서 감자를 수확하니 옛 얼굴들이 그림처럼 떠오른다. 지난 세월은 다시 돌아오지 않고 나 역시 어디론가 돌아오지 않는 길을 가고 있겠지.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오늘 당장 해야 할 일은 감자를 캔 뒤 무엇을 심어야 할까를 결정하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