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떨결에 얼굴은 어디서 한번 본 것 같은데 어디서 봤는지 아리삼삼하고 호감이 가는 모습이지만 말씨는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투박스런 함경도식 억양과 남도 말씨가 섞인 어투가 반말인 것 같기도 하고.
"당신은 누구신데요?" "알아 맞춰 보시유." "어디서 왔는데요?" "도쿄에서 왔시다." "뭐, 일본 동경에서 날아 왔따꼬요?, 저를 어떻게 아시나요?" "지난 여름에 봤잖아요, 기억이 안 나세요?"(입술을 삐죽 내밀며 말하는데 립스틱의 색깔이 진한 고동색이다)로 시작해 한가지씩 묻고 대답하는 스무고개로 문답이 이뤄졌지만 핵심은 빠져나가고 결론은 나를 잘 아는 사람이고, 작년에 진 빚을 갚을려고 왔다는데 그 빚이라는 게 나에게 술 사주는 것이라고 했다.(사람 참 미치고 환장하겠구만, 살다보니 별일 다 겪어보네)
하는 수 없이 장기 레이스다. 이왕 여기까지 온 것 다급하게 생각하지 말고 느긋하게 무슨 사연인지 알아보자는 생각이 들자 목도 마르고 속도 타고 해서 시원한 생맥주부터 한잔 시켰다.
그녀는 맥주는 싱거워서 못 먹겠다고 주종을 바꿔 '바렌타인' 몇년생인가 뭔가를 소주를 마시듯 홀짝홀짝 박치기한 게 벌써 두병째다.
처음과는 반대로 이제는 그녀가 이런 저런 온갖 이야기와 함께 우리나라의 물정을 묻기 시작하는데 도통 알지 못하고, 이야기 도중에서야 그녀를 처음 봤던 작년 여름 8월경 동해안의 해수욕장에서 있었던 사건을 떠올리니 술을 마실수록 더욱 정신이 말짱해지면서 얼마전에 우연히 봤던 신문 기사 중 '그 많던 간첩들 전부 어디 갔나? 일부러 잡지 못하나, 안 잡나?'와 함께 오래전에 보았던 007 영화시리즈의 제임스 본드의 상대역인 본드걸이 문득 떠올랐다.
'웃고 있는 저 여자의 허벅지 안쪽에는 무성소음 레이저 권총을 차고, 너무나 크게 부풀어서 솟아나온 브레지어 속에는 독침 앰플주사약을 숨겨 놓았을 거야…, 술을 마실 때도 놓지 않고 한쪽 팔에 걸치고 있는 뉴비똥 가방에는 공작금이라는 달러뭉치가….'
상상할수록 소름이 끼치는 것 같고 술맛이 떨어지면서도 한편으로는 묘한 호기심이 발동하고….
둘이서 독한 위스키를 세병이나 마셨으니 어느 정도 취했다.
발가스런 얼굴에 언제 가슴의 브라우스 단추를 한개 더 풀어 제쳐 훤히 들여다보이는 붉은 장미빛 브레지어는 마주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뇌쇄적인 모습이요, 도발심을 들게 만들면서도 한편으로는 어디가 모르게 단단한 몸매의 스파이 이미지를 풍겨 감히 접근하기가 두려운 생각이 들어 이쪽에서 기가 죽어 주눅이 들 정도였다.
너무 취한다면서 묵고 있는 객실키를 건네주면서 좀 바래다 줄 수 없겠느냐는 부탁을 해 잠시 혼란과 망설임이 생겼다. 이것을 무슨 뜻으로 받아들어야 하나….
어깨를 부축해 엘리베이터를 타고 9층까지 올라가는 시간이 왜 그리 빠른지, 입안의 침도 바짝바짝 마르고, 영화 제목 같은 '여전사와의 하루밤 로맨스'가 연상되기도 하고, 가슴은 벌렁 벌렁 뛰어 자빠지고….
밖을 내다보니 우리나라의 내륙 호수 중에서 밤의 전망이 제일이라는 보문 호수가의 야경은 불꽃놀이 축제마냥 온통 휘황찬란했다.(제1부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