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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독하기 2025.06.22. (일)

[隨筆]꽃산행

정양섭(시인·수필가)


장암산은 몇년전까지만 해도 남도민의 고향정서를 일깨워 주던 초가집 마을인, 내가 태어난 영광군 묘량면 효동마을의 뒷산이다. 어렸을 적 꽃구름이 넘나드는 산마루를 바라보노라면 하늘을 잡아보고 싶은 나의 동심을 유혹하던 산이요, 또한 나의 꽃산행을 가르치고 길들여 놓은 산이다.

우수가 지나고 날씨가 더욱 풀리면 도랑물을 노랗게 물들이며 슬슬 기어오르는 개나리꽃길을 따라 꽃산행이 시작된다. 처음에 맞아 주는 꽃은 겨우내내 움추렸던 버들개지다. 잔설을 녹이면서 은백색 빛깔의 얼굴로 살포시 포근한 봄의 정취를 풍겨준다. 수줍은 듯 산야를 불태우며 자연의 끈질긴 생명력을 가르쳐주는 진달래꽃, 온 산천을 수놓아 병풍산수화의 진수를 장식하는 산벚꽃, 늦은 봄 산다랑이 논바닥을 온통 비단으로 물들이는 연분홍 자운영꽃이 격의없는 상춘을 만끽케 한다.

어느새 송글송글 이마에 땀이 솟는 여름이면 비 개인 날의 꽃산행이 일품이다. 야생화들이 은빛 빗방울을 머금은 채 꽃망울을 터트려 수수한 자태로 미소를 띄운다. 혀인양 길다란 꽃술에 진분홍빛 털중나리꽃, 삼지구엽초를 닮았어도 냄새가 심하다는 어설픈 꿩의다리꽃, 풀잎사이로 실타래처럼 꼬여 오르며 꽃트림하는 타래난초꽃, 시집가는 새색시처럼 예쁘다 하여 이름한 각시원추리꽃, 그밖에 별모양의 하얀 꽃무리로 어우러져 나비를 유혹하는 까치수염꽃, 초록줄기에 연남색 꽃송이를 피어 올리는 비비추꽃, 후끈한 햇살로 붉은 색실을 더욱 붉게 물들이는 자귀나무꽃, 노란 꽃술 음모인양 연분홍 꽃잎으로 안고서 꿀벌을 유인하는 노각나무꽃을 비롯한 중나리꽃, 멍석딸기꽃, 갈퀴나물꽃, 산달맞이꽃, 물레나무꽃, 산수국꽃, 바위채송화꽃, 도라지꽃, 노루오줌꽃, 말나리꽃 등 헤아릴수 없는 꽃들이 꽃산행의 전시장을 이룬다.

따스한 햇볕이 누그러지고 선선한 가을을 맞이한다는 처서를 지나 산에 오르면, 가을을 시샘하는 한낮의 햇살이 아직은 따갑지만 서늘바람에 하늘하늘 풀벌레들의 고향음에 소슬소슬 가을꽃들이 마냥 청순하다. 만개한 산국화가 청명한 가을하늘과 어우러져 초가을부터 만추까지 끈질긴 생명의 찬가를 읊어준다.

찬서리가 내려 본격적인 가을날씨가 된다는 한로를 지나 산에 오르면 영롱한 이슬로 더욱 해맑아진 가을꽃들이 산들산들 흔들거리며 울긋불긋 총천연색의 단풍잎들과 밀어를 속삭이며 꽃산행을 부추긴다. 녹황색 돌기를 따라 연보라색꽃 범종으로 매달리는 모시대꽃, 나비인양 진보라색 꽃잎 두개를 접고 긴 꽃술머리로 촉각을 더듬는 닭의장풀꽃, 분홍색 꽃송이 주절이 주절이 올곧게 뻗은 호랑이꼬리 모양의 범꼬리꽃 등 이름을 다 헤일 수 없는 가을꽃들이 추정(秋情)을 짙게 물들인다.

이렇듯 꽃산행을 할 때면 "얼굴만 예쁘다고 여자냐, 마음씨가 고와야 정말 여자지"라는 노랫말을 떠 올린다. 아름답고 예쁨을 본연으로 정적한 시공에서 정제된 바람을 마시고 고요한 명상의 밤을 지새우며 견성(見性)하는 고운 자태가 더욱 아름답기 때문이다. 견성이란 모든 탐욕을 버리고 자기 본연의 천성을 본다는 것이니 자기의 성품을 봤다는 뜻이요, 자기의 본성을 깨달았다는 뜻이다. 아울러 우주만물의 근본이치와 그 진리를 알게 되었다는 뜻이다.

나는 봄, 여름, 가을 꽃산행으로 꽃의 견성하는 모습을 되뇌어 배운다. 특히 폭염이 기승을 부려 가마솥같이 찌는 더운 여름이면 어느 산이든 시원하게 연출하는 산령들과 후련히 흘러내리는 계곡수를 따라 무더위를 훌훌 털어버리고 여기저기 지천으로 피어있는 여름꽃을 보면서 산행을 해보라. 사람의 손에 다듬어져 온갖 공해에 시달리는 도심의 꽃에서는 맛볼 수 없는 은근한 맛을 품어내며 별천지의 새 생명으로 꿈틀거리면서, 아름다운 그 자태와 해맑은 웃음으로 반겨주리라.

대다수의 사람들은 산야를 횡보할 때 수많은 꽃들을 보면서도 무심코 지나치기 일쑤다. 그러나 오묘한 순환원리를 생각하며 저 작은 생명의 꽃들이 어떻게 생태계의 고리를 이루고 있는지 감미하면서 꽃산행을 한다면 참다운 인생을 살찌우는 견성을 배우리라. 얕은 바람에 몸을 맡긴 채 하늘거리며 외로운듯 피어나는 꽃이든 가파른 절벽위에 아슬아슬 한송이씩 매달리는 꽃송이든 제각각 강인한 생명력을 시사해 준다. 산새들의 지저귐속에 봄, 여름, 가을철 따라 꽃산행으로 흐드러지는 야생화에 심취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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