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서작골'에서 불어온 매서운 바람이 낙엽을 날리고 망토구름을 거느리며 어디론가 사라지자 아버지의 영상이 눈앞에 잠시 어른거려 눈에 뿌연 안개가 끼었다가 이내 흩어진다.
사십세월 내 삶을 찾을 수 없어 속절없이 흔들리는 이 마음, 친구들과 '용암산'은 알까?
그 위로 간리(산간리)와 멀리 위쪽 고랑에 자리한 '천태산'.
먼 옛날 그곳에서 비자를 줍는다고 싸움을 걸었던 동자승은 어디에 살까? 그때는 그 동자승이 한없이 부럽기도 했다. 그 넓은 산의 비자며 알밤 그리고 감나무에 열릴 노을보다 붉게 익은 감을 마음대로 먹을 수 있을 거란 생각 때문이었다.
그리고 멀리 희미하게 회아리(회송리2)와 다만(회송리1) 안 섶-뫼(대신리 1구), 바깥 섶-뫼(대신리 2구)가 보이고 지금은 세계문화유산 유적지로 지정된 고인돌 산지인 못골(대신 3구)과 아무리 걸어도 끝이 없어 하늘아래 첫 동네라 했던 한재(대산 4구), 템부(양곡)가 보인다.
그러나 지금은 골프장이 들어서고 높은 송전탑이 산업화와 경제성장의 표상(表象)처럼 자리잡고 있어 가슴을 아프게 한다.
초가지붕위에 익어가는 박이 덩그렇게 있고 낮은 돌담옆에 자리한 굴뚝에서 모락모락 피어나는 연기며, 그 아궁이에 고구마며 알밤을 굽던 그 옛날 어릴적 모습이 미치도록 그리워진다.
'용암산'은 비록 다른 지역 사람들에게는 작은 산이지만 내 꿈의 요람이요, 태산(泰山)같은 꿈산이었다.
30년만의 등반은 또 하나의 추억으로 자리잡았다.
꿈을 잊어버리고 살 수 없다. 그것이 이룰 수 없는 꿈이라도…. 또 세월이 흘러 내 아들과 딸이 나 같은 세월을 보내게 되어도 내 꿈인 '용암산'에는 푸른 나무들이 자라고 아름다운 들꽃이 피고 산새와 들짐승이 이 산을 지킬 것이다.
오늘 산길을 내려오는 발걸음이 바람처럼 가볍다.
그래. 어쩌면 이렇게 친구들과 고향산을 찾을 수 있고 희미한 추억을 되새길 수 있다는 것이 행복이며 사랑이다.
한때 나는 누구에게도 사랑을 받을 수 없다는 사실에 세상을 원망하며 살았다. 부모에게조차 아무것도 받지 못했기 때문에 나 또한 남에게 아무것도 베풀 수 없다는 생각이 오랜 세월 나를 지배하며 스스로 허물어져 갔다.
그런 생각이 얼마나 짧고 어리석은 생각이었는지 알기까지는 많은 세월을 보내야만 했으니 받을 수 있는 사랑도 중요하지만 베풀 수 있는 사랑도 저 노을빛처럼 아름답다는 사실을 너무 뒤늦게 안 것일까? 아니 때로는 남에게 베풀 수 있는 사랑이 더 아름답다는 것을 알았다.
철들면 찾자는 저곳은 내 고향이고 꿈에서조차 잊지 못한 고향땅이다.
산에 나무 한그루, 길가에 뒹구는 돌덩이 하나에 감사하며 살아갈 것이다. 그렇게 사랑하며 부대끼며 살면 되는 것이다.
모든 사람은 언젠가는 저 떨어지는 낙엽처럼 한줌의 부토로 돌아가는 것이거늘. 이제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글을 쓸 수 있으니 더이상 욕심을 부려 무엇하랴.
모처럼 올려다본 고향 하늘이 미치도록 푸르러 눈물이 날 것 같다.
마지막으로 부족한 필자의 '용암산' 시를 음미하며 산행기를 마치려 한다. 다만 이 산행기는 고향이야기를 하다보니 주관적인 감성이 많이 개입됐음을 양지하기 바란다.
-용암산- <1집 바다를 넣고 잠든다 중> 솔 이파리 사이로 빗나간 바람 웅장한 바위는 거친 숨을 뿜으며 한치의 틈도 없이 각 이룬 이빨을 세워 천년 또 수천년을 침묵으로 살아왔다 왜군 장수의 날카로운 칼날도 인민군의 붉은 깃발도 산정에 세우지 않은 고집으로 80년 5월에는 마주선 무등산을 보며 흘린 눈물은 예성강을 넘쳐흐르고 속으로 불탄 가슴 울음조차 잊었다 갈라지고 휑하니 뚫린 허리에는 바지를 풀어 내리고 앉은 옹달샘이 흩어진 세월을 잊어 버렸는지 지금도 시러운 청정수가 흐르고 심장에 박힌 쇠말뚝 뽑아내는 날 푸른 정기 하늘로 솟아나 진한 눈물로 쓴 역사는 날려보냈다 이제 너의 울음소리 온 산에 울려 퍼지거든 이렇게 말하리라 나를 떠난 사람 이리 와다오 나를 잊은 사람 이리 와다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