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자들은 용암산이 한천면을 뒤로 깔고 앉아 춘양면의 산보다는 한천면의 산이라고 분류하기도 하지만 어찌 그것을 한천면의 산이라 부를 수 있겠는가.
산 위에서 한천면을 보아라. 그 곳은 금전 저수지와 이름 모를 능선만 보일 뿐 한천면의 특성을 보이는 곳은 어디도 찾을 수 없다.
하늘을 한번 쳐다보고 바로 눈앞을 보아라.
끝없이 펼쳐지는 오뜰이 보이고 우메기(우봉리), 용두리가 있다.
아직도 내 가슴속에 영원히 푸른 물결로 출렁이는 예성강과 베틀바위 아래서 멱감던 모습이 희미한 영상처럼 스쳐 지나간다.
바로 위에는 용암산 정상에서 보면 조그마하지만 예성산이 있다. 춘양면은 풍수지리학적으로 음기가 드세다고 한다.
예성산은 앞에서 보면 바로 여성의 그것과 흡사한데 너무 기가 드세 그러한 음기를 바로 잡기 위해 산신이 남성을 상징한 웅장한 바위로 솟구친 용암산을 만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춘양면에는 여걸이 나오지 않는다는 상상을 하면 필자의 너무 추상적인 생각일까.
조금 오른쪽으로 눈을 돌리면 돌정리(석정리의 옛 이름)가 보인다.
면(面) 소재지이면서 초등학교와 중학교가 있어 나 또한 유년의 시절을 이곳에서 동무들과 뒹굴고 뛰며 꿈을 키웠던 곳이기도 하다.
한때 전교생이 초등학교는 1천300여명, 중학교는 600며명에 이르렀는데 지금은 간신히 명맥만 유지하고 있다.
그리고 조금 오른쪽에는 화실(화림1구), 인동굴(화림1구), 광대왈(화림2구)이 있고 바로 앞쪽 역사(驛舍) 하나없는 '석정 간이역'은 지금은 쉬어가는 열차보다 지나쳐 버리는 열차가 더 많은 곳이다. 아득히 먼 지난 세월 그곳에서 풋사랑을 키웠고, 하얀 연기를 내뿜으며 달리는 열차를 보며 도회지로 나가는 꿈을 꾸고 내 시심(詩心)의 발로였던 소중한 곳이기도 하여 다시 한번 그 기억을 더듬어 본다.
-다시 석정역- <2집 추억이 비어 있다 중> 더는 가까이 다가갈 수 없는 엇갈린 운명이라도 차마 네 곁을 떠날 수가 없구나 이런 우리 가난한 사랑도 가다 쉬어갈 수 있는 간이역이라도 있으니 그래도 행복하지 않느냐 사랑한다고 말 한마디 못했지만 이별과 만남이 머무는 곳에 더 아픈 사랑도 수없이 보지 않았느냐
언젠가는 녹슨 세월의 길목에 서서 뜨거운 눈물 흘리며 죽기 전 한번은 이루어질 수 있는 그런 사랑이라고 그 때까지만 아니, 그 날이 올 때까지만 이렇게 뒤돌아보지 않고 앞만 보고 달려갈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
고개를 돌려 왼쪽 조금 멀리 보이는 곳이 내가 자란 가숭골(가봉리)이다. 지금도 병든 어머니가 계신 집은 좁쌀 만하게 보일듯 말듯하고 봉무정(가봉리 2구)의 수호신인 500년 넘은 당산나무 아래에는 여름이면 온 동네사람들이 모여 누구네 둘째딸은 서울의 구로공단에 가서 돈 벌어와 송아지를 샀다고, 그리고 누구 집 둘째아들은 읍내에서 패싸움질을 하다 합의금조로 문전옥답 두마지기를 팔았다며 소곤거리는 소리가 들린 듯한다. 다른 한쪽에서는 아이들이 사금파리로 땅따먹기를 하고, 또 큰 나무줄기를 타고 타잔놀이가 한창인듯 내 유년의 모습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엉고개'를 넘으면 '고락-뜰' 그 곳에 내 아버지, 아니 아버지의 아버지가 만주벌판을 넘나들며 눈물과 땀으로 지켜온 땅이다
지금은 북망산에 한(限)을 줍고 있지만 아버지는 이 땅은 어떠한 일이 있어도 지켜야 한다며, 집안의 목숨줄이라고 늘 말씀하셨다.
지금도 저 고락 뜰에 아버지의 낫을 쥔 손이 바람을 가르며 질 논에서 막 거둔 볏단을 들고 어서 이리로 오라고 손짓을 하는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