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그 살아가는 樣態의 여하에 따라 債務的 人生觀의 소유자와 債權的 人生觀의 소유자로 대별할 수가 있다.
前者는 자기 일생을 무슨 빚(債務)으로나 알고 사는 사람으로, 그들은 人生의 有限性을 깊이 자각할 때 必然的으로 부지런하고 착실한 인생을 살게 되고 이와는 반대로 人生을 무슨 꿔준 빚을 받아내 듯 남을 무시하고 逸樂만을 追求하는 人生을 산다.
興(힘)이 나면 도둑질을 하고 그것도 귀찮으면 비럭질(乞食)을 하는 식의 제멋대로의 衝動生活者들도 그 類型에 들고, 자고 새면 마을앞 주막집을 들락거리고 하루종일 다방에 앉아 부질없는 잡담으로 날을 보내는 '천덕꾸러기 醉生人間'들도 알고 보면 前生에서 세상에 빚을 놓은 '빚쟁이 人生'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人生은 짧고 有限한 것 '내일 지구의 마지막 날이 오더라도 나는 한그루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마음만이 이 人類社會를 밝히는 등불이고 '有限의 人生을 無限의 생명'으로 늘리는 길이다. '네가 아직 형체도 없었을 때 너(운명)의 눈은 벌써 나의 胚生을 보고 있었다.'
이것은 人間運命의 絶對性을 아름답게 읊은 다윗(10세기경 이스라엘의 統一大業을 이룩한 임금)의 노래의 한귀절이다. 果然 그럴까?
인간들은 자기가 타고난 운명을 도저히 어길 수도 벗어날 수도 없다는 말인가?
'설마?'하고 고개를 저어보지만 No라고 否定할 自信이 나에게는 없다. 善의 反對給付로서 貧賤과 困苦가 주어지고 邪惡이 되려 富貴를 누리는 이 세상에 더러 있는 '不可解의 而迷'에서 우리는 가끔 그것(운명의 절대성)을 느끼고 좌절한다.
그러나 아무리 운명이 존재한다 해도 그것에만 내맡기는 '헐거운 迷諦'보다는 제발로 걷는 螺旋階段의 '힘겨운 踏昇'이 더 떳떳하고 보람찬 人生이다. '두들겨라 그러면 열릴 것이다'하는 말이 조금은 虛失이 있다고 치자. 쉽게 안 열리는 굳게 닫힌 '행운의 문'일지라도 열어보려고 애를 쓰고 노력하는 '意圖의 盡力'에는 그만큼의 報答이 있는 것이다.
마음 가난하기 때문에 善을 쌓고 愚鈍하기 때문에 善을 배우고, 슬프고 외롭기 때문에 善과 사귀는 그 마음…….
이것이야말로 人間社會를 밝게 하는 꺼지지 않는 등불이며 有限의 人生을 永生의 生命으로 늘리는 오직 하나 있는 智慧로운 삶의 要訣이다.
※餘談 한가지. 日本 NHK방송으로 들으니 일본에서는 국가의 경제사정이 풀릴 때까지 年例行事로 돼 있는 '春鬪' 등 一切의 勞動爭議를 全面中止하고 경기好況인 電子 및 造船사업의 종사원들까지 企業의 施設擴充을 통한 고용의 증대를 위해 企業측의 贈給堤儀를 謝絶했다는 것이니……. 그 未來 指向的인 슬겁고 당당한 行步가 부럽기 그지 없고, 그럴 줄을 모르는 일부 自我專念의 성급하고 껄끄러운 國民性과 그렇게 하지 못하는 政治의 領導力 未萌(싹이 안틈)이 아쉽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