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가 30대의 젊은 시절 공직에 있으면서 執權자유당의 욕을 하고 다니다가 상사의 미움을 받고 전남도청에서 강진군청으로 내쳐져 있을 때의 일이다.
그곳 출신으로 湖南 第一의 甲富로 알려진 金○○ 翁이 작고했는데 그 상여 뒤를 따르는 길고 긴 葬列을 보고 철없는 '장난기'가 발동해 다음과 같은 戱作挽章(시) 한수를 써들고 장난친구인 읍내 가까운 金谷寺를 찾았다. 그 시절 申住持는 대학은 다르지만 東京 유학시절부터의 절친한 친구로 만나면 곧잘 악의없는 농담과 毒舌을 나누는 사이로 그것은 잘못돼 가는 세상을 같이 한탄하는 心情의 異常발로였는지도 모른다.
挽章(시)
湖南一富逝(호남일부서)
頓原渴口疾(돈을 갈퀴질)
旣徒誅求免(그도 죽으면)
口滿而盜羅(그만이드라)
" '호남 제일 가는 갑부가 죽었는데, 그 頓死(갑자기 죽음)의 원인은 입마름병이었다. 그래서 굶주린 무리들이 誅求(빼앗김)를 면하고, 그 장삿날 많은 음식으로 배도 채우고, 비단(만장기)까지 훔쳐가더라.' 이 글을 보고 亡人의 영혼을 크게 모독했다"고 正色을 하고 나를 나무라는 申주지에게도 다음과 같은 戱句 한수를 즉석에서 써서 그 손에 쥐어주고 내려왔는데 얼마후 이 소문이 온 고을에 퍼져서 생전에 金翁을 追從하던 사람들에게는 '죽일 놈'이라는 原色的인 욕설과 지탄을 받았으나 다른 一部人에게는 옳은 말했다는 칭송(?)도 받았는데 그 중 특이한 일은 평소에 浪費癖이 심해서 아버지(金翁)의 눈밖에 나있던 막내아들과는 졸지에 十年知己가 돼 사귀는 판에 世人의 많은 指目을 받기도 했다.
'신주지에게 준 弄舌詩'
제목:僧房紅淚(절 안방에서 흘리는 美人의 눈물)
岩間山寺秋色濃, 沼啼隻雁聲不絶
僧房紅淚流成溪, 白夜記情泛落葉
"바위 사이에 있는 절간에 가을빛이 짙으니
못속에 외기러기 짝찾아 우는 소리 그치지 않고
절 안방에 중마누라 옛님을 그려 흘리는 눈물은 시내물을 이루고
그 애뜻한 마음을 적어서 落葉에 실어 띄운다네."
이 장난글도 申주지 婦人의 손에 들어가고 말았지만 나에게는 한마디 怨聲도 없었고, 신주지 내외간의 싸움의 불씨가 됐는데, 그 理由는 남편 申주지가 여러차례 宗團의 스카우트를 받고 中央進出의 기회가 있었지만 번번이 마다하고 시골末寺에만 주저앉아 자기를 고생시키면서 그것도 모자라서 탁발수행(托鉢修行)으로 집(절)을 나가면 몇달이고 소식도 없이 자기를 울렸는데 그 實相을 남편에게 알려줘서 고맙다는 것이었다.
(외간에 戀人이 있다)고 없는 사실을 만들어 신주지를 골려주려는 것으로 刑事告訴를 당해도 할말이 없는 판인데 너그러운 文字解釋(?)으로 被害者의 '감사의 말'까지 들었으니 그렇다고 너무 좋아하면 申주지에게 미안하고 아무튼 세상사에 대한 不滿의 누적은 자칫 사람들을 페시미즘(厭世주의자)로 만들어서 쓸모없는 國民의 量産으로 이어질 수가 있으니…….
새해에는 政治·경제가 제자리를 찾아서 바른 길을 가고, 국민 모두가 제구실을 할 수 있는 밝고 풍요로운 한해가 됐으면 하고 바라는 마음 너무도 간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