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람이는 오늘도 아침부터 분주하다. 아침에 일어나면서부터 유치원 책가방을 챙기고 준비물을 엄마가 옆에서 거들어 준다. 우람이는 올해 7살된 사내 녀석이다. 그러나 우람이에게는 그 시절이면 으레 주어지는 어떤 자유와 혜택도 누리지 못한다. 아침이면 아빠인 나에게 직장에 다녀오라는 인사를 하기가 바쁘게 자기 방에 들어가 뭔가를 준비해야만 한다. 유치원에 갔다 돌아와서도 그냥 편하게 놀 수 없다. 유치원에서 돌아와 베지밀이나 우유 한잔 하고 30여분을 채 쉬지도 못하고 크레파스와 스케치북을 들고 미술학원을 향해 집을 나선다. 물론 집에 와선 가기 싫어 엄마에게 투정을 부리기도 한다.
"엄마 오늘은 그냥 좀 쉬고 놀이터에서 친구들과 놀면 안 돼?"
그러나 엄마는 오늘도 냉정하게 우람이를 강요하여 미술학원으로 보낸다. 미술학원에서 끝나고 나서도 그냥 집에서 쉬는 시간이 주어지지 않는다. 일주일에 두번씩 한글선생이 오고 두번씩 영어나라 선생이 와 저녁 7시가 되어서야 겨우 한 숨을 돌릴 틈이 주어진다.
우람이는 벌써 글도 제법 잘 알아 동화책을 줄줄 읽어내고 받아쓰기도 백점을 받아왔다고 자랑이다. 어떨땐 영어선생이 배워 준 단어를 흉내내어 아빠인 나에게 '대디'라 부르기도 하고 식탁에서 먹는 과일의 영어단어쯤은 제법 아는 눈치다.
"우람아, 넌 앞으로 뭐가 되고 싶니?"
내가 그렇게 물으면 우람이는 로봇 경찰관이 되고 싶단다. 이 세상 어떤 적도 용감하게 무찌르고, 그 무서운 무쇠주먹으로 격파하는 로봇 경찰관이 되고 싶다는 것이 우람이의 꿈이다.
우람이는 어릴 때부터 폭력이 난무하는 비디오를 많이 봤다. 매스컴에서 방영되는 어린이 프로도 대다수가 폭력물 일색이었다. 은연 중 그런 매개체에 전염되었는지 비디오로도 만족을 못해 미술학원에서 집으로 오기 전 잠깐동안, 일요일에 유치원에 가지 않는 날에 잠깐동안 전자오락실로 달려가 가상의 적과 격투를 벌인다. 한번은 집에 돌아와도 우람이가 없어 집사람이 찾아오라고 하여 우람이를 찾아 나선 적이 있었다. 우람이는 격투시합에 정신이 빠져 내가 옆에서 지켜보고 있는 것도 모르고 오락에 열중하고 있었다.
그러던 우람이가 한번은 나에게 아빠는 어렸을 때 꿈이 무엇이었냐고 물어온 적이 있었다.
"응, 나는 말이야. 학생들을 가르치는 선생님."
"쳇, 겨우 그 정도. 좋아하는 애들만 좋아하는 선생님은 난 되기 싫어."
우람이는 벌써부터 선생님이 시시하다고 했다. 유치원에서부터 시작되는 선생님의 차별대우를 우람이가 보아서 그랬는가. 그러고 보면 우람이가 유치원부터 시작된다는 치맛바람을 벌써 눈치라도 챘다는 얘긴지. 막상 아들과 함께 어릴적 꿈 이야기를 하다보니 문득 내가 보냈던 그 시골의 어린 시절이 아련한 향수와 함께 떠오른다.
내가 자라난 고향은 야트막한 산들이 마을을 포근히 감싸고 집에서 약간만 벗어나면 실개천이 흐르는 전형적인 농촌마을이었다. 어릴 때부터 무척 개구쟁이였던 나는 친구들과 들로 실개천으로 마구 쏘다니곤 했다. 실개천에 있던 계곡에서 돌멩이를 뒤집어 가재를 집어 올리기도 했고 막 버드나무 가지에 물이 오를 무렵 버들가지를 꺾어 피리를 만들어 온 동네를 삐리리 삐리리 부르면서 하루를 지내곤 했다.
그러다 배가 고프면 집으로 달려와 부엌에서 찬장을 뒤져서 보리밥과 김치뿐인 식사를 끝내고 나기가 무섭게 다시금 쪼르르 집밖으로 달려가 친구들과 쏘다니면 어느새 서산으로 해가 지곤 했다. 물론 부모님들은 들녘에서 일을 하는 관계로 밥을 챙기는 몫도 나였다. 그래도 아무런 걱정도 없었고 누구 하나 간섭하는 사람이 없었다. 들녘과 실개천이 놀이터이자 학습의 장(場)이었다.
들녘에는 계절마다 피는 꽃이 따로 있었다.
봄이면 민들레, 할미꽃이 피어났다. 5·6월에는 은방울꽃, 보라색 제비꽃도 피었다. 그러다 여름이 되면 부채살 같은 잎을 펼치고 있는 점박이 범부채나 패랭이꽃도 산으로 오르는 언덕배기에 피었다. 아침 일찍 피었다가 한낮에는 꽃을 오므리는 나팔꽃도 보면서 자연을 관찰하였다. 봉선화 꽃잎을 잘라다 손톱에 물을 들이기도 했다. 그것뿐인가. 실개천에는 피라미도 있고 가재도 있고 왕눈박이 개구리도 있었다. 입학을 하기 전 책을 읽을 줄 아는 사람도 없고 영어단어 하나 아는 사람이 없었다. 아예 있는 그대로의 자연이 그냥 친구이자 선생님이었다. 입학하기 전에 글자 한자도 몰랐고 그림도 그릴 줄 몰랐던 그때 그 친구들이 자라서 화가도 되고 사회의 유명인사도 되고 물론 선생님은 되지는 못하였지만 나처럼 공무원도 되었다.
우람이는 오늘도 분주하고도 고달픈 하루를 보내고 있다. 유치원도 다녀야 하고 그 싫다는 그림도 억지로 배워야 하고 아내는 얼마후면 음악학원과 태권도 도장에도 보내겠단다.
내가 "그렇게 꼭 애를 혹사시켜야 겠느냐"고 아내에게 면박을 줄 때면 아내가 항상 하는 말 "당신은 세상을 잘 몰라서 그래요? 요즘 어디 우리 애뿐인가요? 너도 나도 그림공부다, 피아노다, 태권도다 심지어는 7살에 영어회화학원까지 다닌답디다."
내가 빈정거리는 투로 하는 말 "그렇게 모두 다 그림도 잘 그리고 피아노도 잘 치면 앞으로 다 화가 되고 다 피아니스트 되겠군."
"난들 어디 그러고 싶어 그러나요? 모두 들 자식 잘 키워보겠다고 저렇게 야단들인데. 괜히 내 자식만 안 시켰다 낙오되는 것도 싫고."
아내의 말도 어떻게 보면 일리가 있는 것 같기도 하다. 괜히 내 자식만 시류(時流)에 따라가지 못해 낙오자가 될 수도 있다는 말에 괜히 뜨악해지는 마음을 금할 수 없다. 그래도 나는 우람이에게는 자유의 시간을 주고 싶다. 자연을 벗하며 마음껏 만끽하는 자유가 어린 시절만이라도 주어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요즘 신경정신과에 가보면 어릴 때부터 강요당하는 부모들의 극성으로 스트레스에 시달려 정신병을 앓는 어린이도 있다고 한다. 정작 자신이 무엇에 취미가 있는지 관심이 있는지 재주가 있는지도 모른 채 아이들이 부모들의 강요에 의한 고통으로 신음하고 있다. 모든 사람들이 제각각 자신만의 고유한 개성을 찾지 못한 채 그저 남들이 하니 나도 한다는 부화뇌동(附和雷同)의 소용돌이 속에 내몰리고 있지는 않은지 심각하게 생각해 볼 시점이 아닌가 묻고 싶다.
어릴 때부터 폭력물을 접한 아이들이 나중에 어른이 되면 평화를 사랑하는 소시민이 될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도 든다. 그러고 보면 어릴적에 부모의 강요도 없이 그저 자연을 벗하며 살았던 그 시절이 그리워진다. 우람이의 소원대로 친구들과 자유롭게 뛰놀고 자연을 학습의 장으로 삼는 그런 시대가 다시 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