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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독하기 2025.06.23.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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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예마당/寸鐵活仁]농촌의 가을

-浪漫의 糖衣속의


낼 모레가 霜降, 늦게 뜬 下弦달빛이 어둡기는 하지만 하늘은 유리알처럼 맑고 바람 시원한 밤이다. 댓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니 어디선가 진한 香氣가 콧속에 스며든다. 멀리서 더욱 좋다는 蓮잎향기, 唐나라 詩人 杜子美의 愛蓮詩에 있는 '香遠益淸'의 名詩句가 떠오른다.

으스름 달빛에 끌려 그윽한 연잎향기에 이끌려 老松 우거진 마을앞 沼畔으로 발길을 옮긴다. 빛과 그림자가 '비단'처럼 아롱진 좁은 오솔길에 갖가지 가을벌레의 微吟이 빈틈없이 깔려있다. 불쑥 돌아본 빈집 모퉁이 담밑에 주인을 잃은 늙은 호박덩이 하나가 비스듬이 누워있다. 그동안 무성한 잡초속에 隱士처럼 숨어있다가 풀이 시들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줄기는 썩은 새끼처럼 말라붙어 긴 여름동안 孤兒처럼 버려진 설움을 말해준다.

저기 또 하나 삭막한 농촌의 暮秋를 장식하는 산뜻한 畵幅이 있다. 해묵은 古木 높은 가지에 주렁주렁 매달린 '감열매의 朱紅빛깔' 大自然의 텅빈 器皿(그릇)을 채우는…. 시골 아이들의 어린 시절의 기쁨을 反芻케 하는 추억의 風物이다.

학교에서 돌아와 긴 간대를 들고 몇개씩 따먹는 기쁨. 도시소년들에게는 꿈속의 彩畵이다. 조금 열린 댓문사이로 물결처럼 달콤한 향기가 출렁이는가 했더니 허물어진 담모퉁이에 들국화 몇그루가 고즈넉히 피어있다.

문득 '凉風吹過有餘薰', '서늘바람 불고 나서 향기가 남아있다"라는 서투른 詩 한 구를 읊어 본다. 이 한철 꽃을 피우기 위해서 그 길고 무더운 여름날을 살아 온 끈질긴 意力이 그 얼마나 장한가.

길 위에 떨어진 철이른 落葉을 밟고 마을 뒷산에 오른다. 白苔처럼 엷게 낀 서리를 손바닥으로 쓸고 언덕에 앉아 마을을 굽어보니 탈곡을 끝낸 집 마당에 그 사는 '形勢의 부피만큼' 볏짚이 쌓여 있다.

부자는 집채만큼 크고, 가난한 집은 헛간보다 작고 그러나 밥짓는 연기는 똑같이 솟아 하나로 엉켜 온 마을을 덮고 있으니 마치 人間社會의 無常과 不齊를 하늘에게 가리는 것 같아서 절로 한숨이 나온다.

이윽고 아침 햇빛이 사방에 번지면 우리를 뛰쳐나온 집오리가 서리위에 鮮明한 발자국을 새기며 물속에 뛰어들고, 어젯밤 飽食으로 늦잠을 잔 고양이도 일어나 어정어정 부엌을 찾는다.

이렇게 湛水처럼 조용하고 '먼 곳의 모닥불처럼' 썰렁한 아침이 며칠동안 계속되다가 갑자기 까마귀떼가 몰려와서 마을앞 텃논에 앉으면 그때부터 긴긴 겨울이 시작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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