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거꾸로 살아온 생활에 익숙해졌기 때문일까. 하루 종일 진실 아닌 웃음을 흘리곤 피곤해진다. 그러다가 어느 한순간 자신을 이기지 못해 당황해지기도 하지. 생활속에 진실은 없고 거대한 모순의 세계에서 무생물처럼 건조하게 살아가는 자신을 들여다 보면 기막힌다. 꾸역 꾸역 길이로만 엮어 가는 시간의 나열이 진정 생활이란 말인가.
간간이 재미를 더하기 위해 남 헐뜯기에 가담하거나 사회를 뒤집어 엎는데 솔깃해 하면서 모험을 택하기도 한다. 이것도 시들해지면 이미 반쯤 죽여놓은 모든 것들을 다시 살린다며 호들갑을 떨 때도 있지. 이렇게 하면서 삶의 보람을 찾는다는 사실은 매우 역설적이지 않나. 결코 사리에 맞지 않는 것들을 떳떳하고 보람 있는 일로 확신해 버리는 일들은 또 얼마나 자주 일어나는지.
곰곰이 생각해보게.
죽어가는 또는 사라져가는 모든 것들의 원인 제공자는 바로 우리 자신이었음을. 그런데도 불구하고 아무 잘못 없는 대상들을 단죄하면서 느긋해 하지 않았던가. 동네에 소나 돼지를 잡아주는 사람이 살고 있었지. 그 사람은 언제나 악의 씨앗이나 되는 양 천대받고 살았지. 그러나 동네 사람들은 모두 고기국을 좋아라 했었거든. 살생을 금한다지만 살생없이는 아무도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이 증명된 셈이지.
진실이 퇴보하고 대신 진실 아닌 것이 득세하는 또다른 모습을 보겠나. 미국이 자신은 핵무기로 무장하고 있으면서 다른 나라는 핵무기를 보유하지 못하게 하는 이상한 행동을 예로 들겠네. 자국의 안보는 그 나라 스스로가 감당하는 것이 아니겠나. 미국이 어떻게 다른 나라의 행동을 간섭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문제는 세계 어느 나라도 미국의 이러한 행동을 비판하지 못하는 것이라는 사실에 있네. 오히려 이러한 미국의 행동을 찬양할 뿐만 아니라 미국에 적대적인 국가를 비난하는 것이 현실이지. 이러한 현상을 보면 인간 세상에 정의란 없다고 해야 하지 않겠나. 약육강식의 논리가 통한다면 이 세상의 하고 많은 진리는 허상이란 말인가. 이런 모순의 세계는 어디서부터 오는가. 또 내일도 계속될 것을 생각하면 지루하지 않는가.
현대 의사들이 스트레스라는 병원균을 발견했다는데 기막힌 일이지. 병원균을 찾지 못하고 애매모호한 스트레스, 과로로 진단을 내리고 손을 털어 버리는 의사들을 보게. 다른 말로 표현하면 그것은 의사 자신이 환자로부터 병의 원인이 되는 균을 못 찾았다는 항복의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닌가. 스트레스는 어디로부터 오는가. 양심을 거부하고 되는 대로 사는 삶에서부터 오는 것인데 그것은 언어로부터 감염되는 것이거든. 얼마나 많은 언어들이 우리의 양심이나 이성을 피폐시켜 왔던가를 생각하면 화까지 치민다네. 그렇다고 화만 버럭 내어서는 일을 망치겠으므로 스트레스의 진행과정을 단계적으로 이야기해 보겠네.
일단 불완전한 언어에 의해서 감염되면 스트레스의 초기 증세는 매사에 대한 자신감으로 나타난다. 이 때의 증상은 의욕적이며 왕성한 식욕을 동반하지. 하루 하루가 즐겁고 이유없이 의미있어 보여서 희망을 갖는 시기란 말이야. 상대적으로 다른 사람들을 약간 깔보기 시작할 때가 바로 이 때지. 이런 상태에서 세월이 좀 흐르면 소위 발전기가 다가온다네. 즉 스트레스의 증세가 외부로 나타나는 시기이지. 약간 초조해지면서 남과 비교하기를 즐기는데 결과는 늘 비관적이지. 자신이 깔보았던 이웃이 자신보다 못지 않음을 깨달으면서 발진이 시작되는 거라구. 그토록 자신했던 모든 것에서 한발 물러서면서 두려움을 갖게 되는 거야. 즉 자신감을 팔아서 두려움을 사면서 살아가는 셈이라고나 할까. 이 과정을 거치면서 마지막 단계인 숙성기가 도래하거든. 이때의 증상은 잠을 제대로 잘 수 없는 고통의 시간들이 오면서 자신을 결코 빠져나올 수 없는 늪으로 빠뜨려 놓고 히죽이 웃고 있는 상태지. 자신감 대신에 매사가 두렵고 소극적이 되며 다른 사람들을 기피하게 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