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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예마당]제2회 부산지방국세청 문예콘테스트 수상작

<수필부문 최우수상> 고마운 생명나무 -강혜윤 마산署


인자한 사람은 산을 좋아하고 지혜로운 사람은 물을 좋아한다는 말이 있지만 이 말과는 상관없이 저는 산을 더 좋아합니다. 산이 가진 느낌이 더 마음에 듭니다.

인자함고 지적인 분위기, 그리고 그 안에 살고 있는 수많은 꽃과 야생동물들이 좋고 수많은 물줄기와 계곡과 그 안에 있는 `또다른 생명들'이 좋습니다. 그 많은 것들을 다 품고도 푸름만 보여주는 게 좋습니다. 하지만 제가 산을 좋아하는 가장 큰 이유는 그곳에 나무가 있기 때문입니다.

힘이 들 때, 사람들이 무서워질 때. 그래서 어딘가 아무도 없는 곳에 숨어들고 싶을 때. 제가 자주 찾는 곳은 바로 나무가 있는 곳이었습니다. 어린 시절에는 커다란 나무 밑으로 숨거나 집 뒤에 있는 감나무 위에 올라가곤 했습니다. 자라면서 언제부턴가 저는 나무가 잔뜩 서 있는 곳을 보고 있었습니다. 대학시절에 3층 대강의실의 제일 뒷자리에 앉곤 했는데 그 자리에서는 커다랗고 멋들어진 튤립나무를 볼 수 있었습니다. 힘이 들 때는 창턱에 앉아 나뭇잎을 만지작거렸습니다. 다리가 공중에 떠 있어선 지 가슴이 콩닥거렸습니다. 저 아래 사람들이 작아 보이고 나무가 작아 보이고 세상이 만만해졌습니다. 힘든 일도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고3이 되어서 고1 때부터 가고 싶었던 부석사에 간 적이 있습니다. 언제나 상상만 하고 있던 그곳에 가게 되었을 때 처음으로 혼자 기차여행을 했습니다. 비둘기호를 타고 덜그럭거리는 출입문을 활짝 열고 바닥에 앉아 지나가는 풍경들을 보았습니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낯설었지만 놀라웠고 새로운 곳에 있다는 것이 참 즐거웠습니다. 첫 마주함이 주는 감동. 그렇게 부석사에 도착했습니다. 소백산맥에 자리 잡은 부석사는 주위가 온통 푸른 나무로 가득했습니다. 총무스님께 며칠 묵을 수 있는 허락을 받고 짐을 풀고 경내를 구경하면서 절 어디를 가도 따라다니는 향기를 느꼈습니다. 신선한 공기에서 느껴지던 달콤함. 그제야 분홍색 꽃이 핀 커다란 나무들을 보았습니다. 자귀나무. 책에서 그림으로만 본 제 생일과 닿아있는 나무입니다. 탄생화.
`이런 나무가 정말 있을까 이 꽃은 예쁘다고 써있지만 하나도 예쁜거 같지 않아'라고 생각하던 제 나무를 그 날 처음 보게 되었습니다. 커다란 나무둥치와 낯선 나뭇잎과 꽃잎의 생김. 제 나무가 정말 있다는 것과 그 나무가 부석사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인연이 이런 거구나, 좋은 것들은 함께 있구나' 했습니다. 그리고 책에 쓰여진 말처럼 자귀나무의 꽃은 정말 예뻤습니다. 빛깔과 자태와 향이 모두 어울리는. 지금도 부석사를 떠올리면 자귀나무 푸른 잎들과 분홍 꽃들과 그 향긋한 내음이 흔들거립니다.

지난해 날씨가 유난히 따뜻한 봄날이었습니다. 소풍을 가고 싶다는 생각이 갑자기 들어서 무작정 버스를 탔습니다. 버스에서 목적지를 어디로 할까 생각하는데 예전에 혼자 좋아하던 사람의 집에 가고 싶어졌습니다. 한번도 가보지 않았던 곳이고 한번도 본적이 없는 사람이었지만 혼자 참 많이 좋아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가는 도중 화분을 파는 곳을 지났습니다. 너무 이쁜 나무가 한그루 있었습니다. 작았지만 향기가 좋았고 색이 연두에서 노란색으로 옅어지는데 참 이뻤습니다. 무작정 나무를 사고 이름을 지었습니다. 그린비. 남자친구. 여자친구의 순우리말이 단비, 그린비란 말을 들은 적이 있는데 그 나무에 어울리는 이름을 생각하니 그 단어가 떠올랐습니다. 그리고 아주 힘들게 그 사람 집을 찾았습니다. 골목 깊이 있어 부동산아저씨도 잘 모르시고 다른 분들도 잘 모르셨습니다. 한참을 돌아다니다 다행히 반장이란 분을 만나게 되어 겨우 찾게 되었습니다. 아무 말도 못하고 집 앞에 화분만 내려두고 돌아 왔습니다. 가끔 꽃집을 지날 때 그 나무가 있으면 그 사람 받아 보았는지 나무는 잘 크고 있는지 궁금해집니다. 그래서 나무를 흔들어 향기를 맡아봅니다. 은은한 향기를 맡고 있으면 나무도 그 사람도 잘 지내고 있을 거란 확신이 생깁니다.

예전에는 딸을 낳으면 오동나무를 심어서 시집갈 때 장롱을 해줬다 합니다. 정말인지 그냥 내려오는 말인지 확인해 본적은 없습니다. 다만 그 이야기를 들을 때 내 이름과 같은 내 나무 한 그루 있었으면 좋겠구나 생각했습니다. 그랬다면 전 항상 그 나무를 찾아가고 함께 자라왔을 겁니다. 제가 아이를 낳으면 그 씨앗을 받아 다시 새 묘목을 키워 아이의 이름을 붙였을 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오랜 시간이 지나면 언젠가 본 나무 심는 노인의 푸른 산처럼 제 나무의 주위가 온통 나무의 아들·딸 나무, 손자나무들로 가득 차서 갖가지 푸른색을 띄게 될 겁니다. 그 속에 다시 이름 모를 꽃들과 나무와 작은 동물들, 곤충들이 찾아든다면 작은 산이 하나 생길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전 제 나무를 가지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앞으로 결혼을 하고 어머니란 큰 존재가 된다면 아이들의 나무를 심어주고 싶습니다. 그 아이들 한 명 한 명에게 어울릴 나무를 심는다면 집 주변만큼은 나무로 가득하게 될 겁니다. 나무가 가득한 뒤뜰에는 작은 오두막을 하나 지어두고 싶습니다. 그곳이 아이들이 힘든 일이 있을 때나 혼자서 쉬고 싶을 때, 안심하고 기댈 수 있는 안식처가 된다면 참 좋을 것 같습니다. 좀더 나무가 자라고 아이들이 자라면 의자와 탁자를 몇 개 놓아둬야 겠습니다. 그러면 지나가는 사람들이 쉴 수도 있을 것입니다.

나무를 너무 좋아하는 까닭에 나무 같은 사람을 만나고 싶다는 생각을 자주 합니다. 이런 얘길 하니 친구가 어떤 사람이 나무 같은 사람이냐고 물었습니다. 나무가 좋아서 그를 닮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지만 어떤 사람이란 생각을 뚜렷이 해본 적은 없었습니다. 나무 같은 사람. 한참 생각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나무 같은 사람인지를. 그리고 이런 사람이지 않을까 하는 몇 가지가 떠올랐습니다.

나무 같은 사람은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성장하는 사람입니다. 누가 봐주는지는 신경 쓰지 않고 자신의 성장을 꾸준히 지속하는 사람입니다. 어려운 일이나 슬픈 일이 생겨도 자신의 자리를 묵묵히 지키는 굳셈과 누구든 그를 찾으면 반갑게 맞이하고 작은 바람에도 흔들리는 나뭇잎처럼 작은 변화에도 반응할 줄 아는 섬세함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리고 자연에 순응하여 자신이 자연의 일부임을 아는 사람입니다.

그밖에 많은 나무의 모습이 있겠지만 이 몇 가지만 충족한다 해도 참 멋진 사람일 것이라는 생각을 하며 얘기하는 동안 자꾸만 웃음이 나왔습니다.

나무에는 많은 추억이 담겨 있습니다. 봄이면 떨어지는 벚꽃잎을 받으며 소원을 빌고 가을이면 떨어지는 낙엽을 받으며 소원을 비는 것부터 여행지에서 본 나무, 친구와 비밀 얘기를 하고 소중한 사람에게 선물한 나무, 그리고 나의 아이들에게 심어주고 싶은 나무와 나무를 닮은 사람을 만나고 싶은 마음까지 제 삶에는 어디를 들여다봐도 나무라는 존재가 우뚝 서 있습니다. 나무가 주는 사건이라면 결코 나쁘지 않을 것이라 믿으므로 앞으로 얼마나 많은 일들이 나무와 이어질지 기대가 됩니다. 저기 은행나무가 빈 가지를 흔들고 있습니다. 오늘은 바람이 많이 부는 날인가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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