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4월 '대통령에게 드리는 건의문' 작성 실무를 맡았던 당시 박찬훈 국세동우회편집인의 회고를 들어 본다.
-국세청 수뇌부의 잦은 사건 사고로 갓 출범한 MB정권의 청와대에서는 국세청장자리를 공석으로 남겨 둔 채, 국정수석실이 주관하고 기획재정부를 중심으로 사정기관이 참여하는 ‘국세청개혁위원회’라는 태스크포스(taskforce)를 구성하여 소위 국세청을 손보는 작업에 들어갔다. 논의결과, 6개지방청 폐지, 대 세무서체제로 개편, 조사전담부서 신설, 국세청 비리감찰과 중요 인사권을 기획재정부로 이관하는 등, 그야말로 국세청을 고질적인 부패기관으로 낙인찍어 자율권을 없애버리는 참으로 굴욕적인 내용으로 결론을 내고 대통령의 사전결심을 얻어 곧 시행결재만 남겨둔 지경이 되었다.
“박 형, 오늘 오후3시 경에 시간이 되면 내 사무실에서 좀 만납시다.” 추 회장님의 다급한 전화다. 회장님과 나는 국세청 앞날에 대한 걱정, 선배로서의 역할 등등으로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추경석 “대통령께 직접 건의를 하면 어떨까?”
박찬훈 “청장이 공석인 현 시점에서는 그 방법이 제일 좋을듯합니다.”
추 회장님은 이미 본인의 생각을 정리한 메모지 몇 장을 건네주시면서 건의문작성을 부탁하셨다. 그 분의 통찰력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대통령께 직접 드리는 건의문이니만큼 절대로 외부보안에 신경써야합니다. 박 형이 고생스럽더라도 비밀리에 혼자 수고를 좀 해줘야겠습니다.”
숙제를 갖고 돌아온 나는 한동안 어떻게 해야 할까?- 혼자서 끙끙거리며 며칠을 고생해서 작성된 원고가 회장님 검토를 거치면 또 다시 정정하는 과정이 수 없이 반복되었다. 현직 때 추 청장님 결재를 받아본 경험이 있는 분은 가히 상상이 될 거다. 건의문은 그렇게 작성되었고, 회장님도 흡족해하셨다. 건의문은 Y모 비서관을 통해 대통령님에게 전달되었다.
이명박 대통령에게 올라간 건의문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전략>나라의 운명을 가늠하는 중요한 시점에서 최근에 경륜이 일천한 후배 국세청장들이 연달아 사퇴하는 사고가 이어져 국세청에 믿음과 사랑을 보내주신 국민과 대통령님께 실망을 드린 점 대단히 송구스럽게 생각합니다. <중략>국세청은 1966년 개청한 이래 우수인재를 확보하고 공정인사를 시행하는 한편으로 꾸준한 직무교육을 통해서 다른 어느 기관보다 끈끈한 조직분위기와 일사분란한 조세전문조직으로 성장해왔습니다. 뼈를 깎는 아픔을 견뎌야하는 수차례의 숙정을 통해 자체정화 또한 게을리 하지 않았습니다. <중략>
국세청장의 연이은 충격적인 구속과 근자에는 외적상황변화에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하여 정부와 국민에게 큰 실망을 끼친 것은 사실이지만 이는 훌륭한 경륜과 사명감이 투철한 새 청장이 임명되면 흐트러진 조직을 빠른 시일 안에 쇄신하여 대통령님이 기대하는 훌륭한 조직으로 다시 발전할 것입니다.
'몇 명 청장 개인적 과오 외엔 특별히 문제 없는 조직체계를 바꾸는 건 부당'
근래에 신문지상을 통하여 지방청폐지 등 국세청조직을 근원적으로 개편한다는 뉴스가 나오고 있습니다. 세계경제의 판도가 급변하고 21세기에 맞는 새로운 국세청 조직의 검토는 반드시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근간의 사태로 인하여 불필요한 외부간섭을 불러들인다면 국세청조직의 독립성을 해치고 나아가서 개청이후 43여년 다져온 조직을 균열시켜 국가적으로 큰 손실을 가져올 가능성이 적지 않다고 생각되어 대통령님께 저희들이 모은 뜻을 적어 건의 드리고자합니다.
□첫째, 국세청에 대한 개혁은 조직의 규모를 고려해야합니다.
국세청은 기획재경부 산하 외청(外聽)이지만 본청 10개국, 교육원, 6개지방청, 107개 세무서에 2만여 명의 직원을 거느리는 거대한 조직입니다. 기획재정부 906명, 관세청, 통계청, 조달청 등 다른 외청의 정원합계가 7,703명임을 감안하면 다른 청과는 확연히 구분되어야 합니다. 정부조직은 규모로서 중요성을 판단할 수는 없고, 방대한 조직에 대한 변혁은 외부의 건전한 비판에도 귀를 기울이는 것이 마땅하나 도를 넘는 간섭은 곤란하며 조직내부의 자율적 변화의지와 종사 직원의 공감을 바탕으로 자율적 참여가 있을 때 비로소 추진 가속도가 붙고 성공을 기대할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조직변혁의 추진주체는 반드시 국세청이 중심되어야합니다.
□둘째, 국세청은 헌법에 규정한 국민의 납세의무를 실현한다는 점에서 다른 일반조직과는 차별되어야합니다. 국세청은 중앙정부기관으로서 전국 중요 시· 군에까지 조직망을 가지고 있으면서 국민의 납세의무를 다루는 유일한 기관이기 때문에 대통령의 통치철학이 반영되어야할 특수조직임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246개 지방자치단체는 저마다 독립을 외치며 ‘지치왕국화’ 되어가고 있는 현실에서 향후 중요한 경제정책의 원활한 운영을 위해서는 전국적 행정망을 갖추고 있는 실무집행기관으로서 유일한 국세청조직의 활용이 필수적이라 할 것입니다. 선진국에서는 국세청이 중앙정부의 중추적인 지방조직으로 활용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해야 할 것입니다.
□셋째, 세수가 불안한 여건에서 몇 명 청장의 개인적 과오라 할 수 있는 사건이외에 특별히 문제가 없는 조직체계를 근원적으로 흔드는 변화는 시의에 맞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중략>
일반조직과 달리 국민의 의무를 실현하는 조직은 작은 실수에도 큰 혼란의 가능성이 항상 존재합니다. 내부적으로 조직원 전체가 흔들리고 납세자의 불안이 가중되면 결과는 극히 불투명할 것입니다.
□넷째, 국세청을 반석위에 올려놓기 위한 개혁은 현실적인 정확한 진단과 납세자편의가 우선적으로 고려되어야 합니다. 국세청조직체계는 사회적 여건이나 역사, 납세의식 수준· 풍토 등이 함께 고려된 결과이기 때문에 성공의 담보 없이 무작정 우리나라에 대입시켜 부작용을 초래하는 시행착오가 있어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후략>-
건의서에는 추경석 국세동우회장(8-9대 국세청장)을 필두로 김수학(4대), 안무혁(5대), 성용욱(6대), 서영택(7대), 임채주(10대) 이건춘(11대), 안정남(12대), 손영래(13대) 등 정치인 이용섭(14대)과 작고한 이낙선-오정근 1-2대 국세청장을 뺀 역대 국세청장 전원과 황재성(서울), 정진택(중부), 김보현(대전), 박요주(광주), 김덕한(대구), 안위철(부산) 등 국세동우회 각 지방회장들이 서명했다. 비위혐의로 파국을 일으킨 이주성(15대)·전군표(16대)·한상률(17대) 등 세 전 청장은 제외됐다.
'국세청 무력화'를 기획한 청와대국정기획실, 기재부, 사정기관 등의 합작품인 '국세청개혁위원회'는 뜻 있는 국세동우들의 충정어린 건의서 한장으로 초라하게 퇴장했다. <계속>
서채규 주간 <seo@taxtime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