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들의 침착한 대응과 도움이 일명 '트렁크 살인 사건' 용의자 체포에 큰 힘이 됐다.
용의자 김일곤(48)이 난동을 부린 동물병원 직원들은 김씨가 흉기로 위협,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 와중에서도 경찰에 신고를 했다. 또 경찰이 격투 끝에 김씨를 제압하는 과정에서는 인근 건물의 경비원, 50대 행인 등이 적극 도움을 준 것으로 밝혀졌다.
김씨가 체포된 동물병원 관계자의 말을 종합해보면 김씨가 서울 성동구 성수동의 한 동물병원을 처음으로 찾은 것은 이날 오전 8시30분이 조금 지난 시각이었다. 진료 시작 시간인 오전 9시를 앞두고 수의 간호사 A씨가 청소를 하고 있었다.
A씨는 김씨가 찾아와 문을 열고 들어오자 "아직 진료를 시작하지 않았다. 오전 9시가 넘어서 오라"고 말했고, 이에 김씨는 자리를 떴다가 오전 9시20분께 다시 병원을 찾았다. 오전 9시15분께 원장 B씨가 출근한 뒤였다.
김씨는 A씨와 B씨가 모두 있는 자리에서 "개가 다른 동물병원에서 진료를 받았는데 진료해도 특별한 병명을 알 수 없다고 하더라. 아프고 밥도 못 먹어 너무 불쌍하니 안락사를 시키고 싶다"면서 안락사 약을 요구했다.
애완견의 상태도 보지 않고 안락사 약을 줄 수는 없는 일이었고, 해당 동물병원에는 안락사 약도 없었다.
B씨는 "안락사를 시키고 싶으면 개를 데리고 오라. 상태를 보고 개가 진짜 힘들면 다른 병원으로 보내거나 안락사를 시키겠다"며 애완견을 데려오기를 요구했다.
김씨는 "개를 데려오기가 힘들다. 푸들인데 10㎏가 넘는다"고 안락사 약을 달라고 요구하다가 B씨가 계속 안된다면서 "그럼 왕십리 쪽에 있는 큰 동물병원에 가보라"면서 전화번호를 적어주자 다시 병원을 떠났다.
하지만 20~30분 정도가 흐른 뒤인 오전 9시50분께 다시 김씨가 해당 동물병원을 찾아왔다. 세 번째로 온 것이었다. 김씨는 "아내가 개를 데리고 올 것이다. 나는 여기서 기다리겠다"며 동물병원 접수처 앞 의자에 앉아있었다.
접수처를 지키는 간호사 A씨의 말에 따르면 김씨는 가만히 앉아있지 않고 동물병원 안쪽에 있는 미용실 문을 열어보는 등 왔다갔다했다. A씨에게 자꾸 말을 걸기도 했다.
A, B씨는 김씨를 처음 봤을 때부터 조금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고 했다.
A씨는 "청색 티셔츠에 면바지를 입었는데 무섭게 생겨서 꺼림직했다. 동물병원에 오는 사람들은 강아지에 대해 잘 아는데 이 사람은 안락사 이야기만 하는 것도 이상했다"고 말했고, B씨 또한 "눈빛이 약간 멍했다. 남루한 차림이었다"고 했다.
A씨는 영 느낌이 좋지 않자 병원에서 돌보던 길고양이를 진료하던 원장 B씨가 있던 진료실로 들어가 B씨를 불렀다. 김씨가 칼을 꺼내든 것은 그로부터 1, 2분 뒤였다. 과도보다는 크고, 식칼보다는 작은 칼이었다. 김씨는 "움직이지 말라"고 소리를 지르며 진료실로 쳐들어왔다.
A씨와 B씨는 놀랐지만 김씨를 흥분시키면 변을 당할까봐 알겠다고 하면서 뒤로 조금씩 물러났다. 진료실은 접수처 쪽 문 뿐 아니라 미용실로 연결되는 뒷문이 있었다.
당황스러운 상황에서도 A씨와 B씨는 뒷문을 떠올리고 김씨를 다독거리면서 뒤로 물러나다 날쌔게 진료실 뒷문을 열고 미용실 쪽으로 들어가 문을 잠궜다.
김씨는 접수처 쪽으로 난 미용실 문 쪽으로 돌아가 문을 두들겼지만 A씨와 B씨, 미용사 C씨가 문을 잠그고 붙잡고 있는 상태였다.
이들은 문을 붙잡고 C씨의 휴대폰을 이용해 경찰에 신고했다. 김씨가 바깥에서 소리를 듣고 "신고하는 것이냐, 약만 주면 가겠다"고 소리를 질렀지만 이들은 "안락사 약이 뒤에 있어서 지금 드리려 한다"고 말하면서 김씨를 설득하는 한편 경찰에 신고를 했다.
당황해서 말도 잘 나오지 않았지만 세 사람은 전화를 바꿔가면서 신고를 마쳤다.
A씨는 "문이 열리면 죽는다는 생각 뿐이었다. '이대로 죽는구나'라는 생각도 했다. 너무 무서워서 말도 나오지 않는 상황이었지만 셋이 돌아가면서 신고했다"며 "강도가 들었다고 신고했던 것 같다"고 했다.
신고를 한 것이라 생각한 것인지 김씨는 이내 동물병원을 떠나 도망을 쳤다. 김씨가 동물병원 관계자들의 신고를 받고 출동하던 경찰을 맞닥드린 것은 동물병원에서 1㎞ 정도 떨어진 곳이었다.
김씨는 경찰차가 보이자 서울 성동구 성동2가 3동의 한 빌딩 앞에 주차돼 있던 승용차 뒤쪽으로 숨었다.
해당 빌딩 경비원으로 일하는 김모(66)씨의 말에 따르면 경찰은 몸을 숨기는 김씨를 발견하고 승용차 쪽으로 다가왔다. 그러자 김씨가 길로 뛰어나왔고, 격투가 벌어졌다.
길가 가로수에 넘어지는 등 격투가 이어진 가운데 김씨는 배를 들치고 차고 있던 복대에서 흉기를 꺼내 마구 휘둘렀다. 동물병원에서 꺼낸 흉기와 같은 것으로 보인다.
또 다른 목격자의 말에 따르면 경찰이 양손을 뒤쪽에서 제압했지만 김씨는 팔을 힘껏 빼기도 하는 등 5분여 동안 긴박한 상황이 이어졌다.
결국 경찰에 제압당한 김씨는 경찰 한 명이 배 위에 앉고, 또 다른 경찰이 팔을 붙잡은 상황에서도 몸부림을 쳤다.
이 때에도 시민의 도움이 있었다. 처음에 김씨가 흉기를 휘두르는 것을 보고 겁을 먹고 선뜻 다가가지 못하던 경비원 김씨와 또 다른 50대 행인 D씨는 김씨가 경찰 2명이 힘겨워보이자 다리를 붙잡아 수갑을 채우는 것을 도왔다.
경비원 김씨는 "지나가던 D씨가 허벅지 쪽을 누르고, 내가 발목을 붙잡아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 D씨가 먼저 다가가 도우길래 나도 다가가 도왔다"고 했다.
목격자들의 말을 종합해보면 김씨가 차고있던 복대에서는 휘두른 과도와 다른 과도가 나왔다. 주머니에서는 커터칼과 면도기, 립스틱, 안경 등이 나왔다.
한편 성동경찰서 성수지구대 경찰들에게 체포된 김씨는 성동경찰서로 압송돼 조사를 받고 있다. 경찰은 김씨의 추적에 난항을 겪으면서 공개수배 전환은 물론 서장(총경)을 수사 전면에 앞세우고 검거자에 대한 특진까지 내걸은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