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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국세

[연재]“현직 세금쟁이가 장학재단을?”

-'나는 평생 세금쟁이'- (73)

몇달전 필자는 내가 직접 설립한 석성(石成)장학회에 대해 살짝 언급했었는데 앞으로 몇 차례에 걸쳐 그것을 만들게 된 애틋한 사연과 함께 그 후 일어났던 감동스토리 몇가지를 소개할까 한다.

 

참고로 필자의 부모님은 흔히들 말하는 ‘배움의 끈(?)’이 너무 짧아서인지는 몰라도 다른 부모님들에 비해 세상을 당당하게 사시지를 못했다. 또 아버지의 잘못된 술버릇으로 인해 두분 사이도 별로였다.

 

특히나 어머니께서는 장남(長男)의 갑작스러운 죽음과 남편과의 잦은 부부싸움으로 인해 얻은 중풍병으로 얼마간 고생하시다가 필자가 군대에 있을 때인 1972년 어느 겨울날 그만 하늘나라로 가셨다. 그것도 젊디 젊은 52세의 나이로….

 

한편 아버지께서도 어머니 살아계실 때 잘 못해 주신 것이 두고두고 한이 되셨는지 어머니가 떠난 후 십여년동안 몹시 괴로워하셨다.

 

“용근아! 너도 알다시피 나와 네 어머니는 한평생 국민학교 문 턱에도 한번 가보지 못한 ‘일자무식’이란다. 그래서인데 너만은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열심히 공부해서 사회에 나가서 당당하게 살아가거라.”

 

늘상 나에게 그렇게 말씀하시던 그 아버지께서도 유난히도 눈이 많이 내리던 1984년12월30일 한밤중에 어머니가 계시는 하늘나라로 가 버리셨다.

 

그 때 그 아버지께서는 몇년간이나 살고 계셨던 허름한 한옥집 한채를 남겨 주셨다. 물론 그 집도 내가 어렵게 사드렸던 집이었지만…. 얼마 후 그 집을 처분해보니 5천만원이나 되었다. 그 돈으로 10년간 재테크해 보았더니 무려 2억여원으로 불어났다.

 

 

 

1994년 마침 그 때가 ‘공무원 재산등록제’를 처음으로 실시할 시기여서 아내와 상의했다.

 

“그건 우리 것이 아니잖아요?”

 

그 때 아내의 그 말 한마디에 나는 큰 충격을 받았다. 넉넉지 않은 우리 살림살이인 데도 불구하고 간도 크게 그런 말을 하다니….

 

 

 

 

조용근 이사장이 아내 유영혜 석성장학회 이사장과 2014년4월19일, (재)석성장학회 창립20주년 기념식 및 장학금 전달식을 갖고 있다.

고심 고심 끝에 필자는 불쌍한 아버지와 어머니의 간절한 염원을 담아 장학재단을 설립하기로 결심했다.

 

“그런데 장학재단 이름을 무엇으로 할까?”

 

며칠간의 고민 끝에 결국 아버지와 어머니의 이름 가운데 글자를 따서 ‘석성(石成) 장학재단’이라고 지어 보았더니 꽤나 괜찮아 보였다. 즉시 재단 법인 설립인가를 받으려고 관련부처에 알아 보았더니 기본재산이 3억원이 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어쩔 수 없이 ‘석성(石成)장학회’라는 임의단체로 출발했다.

 

처음에는 매년 은행에서 나오는 정기예금이자 수입으로 가까운 지인이 추천해 준 강원도 산골 화전민촌에 살고 있는 어려운 청소년들 몇명에게 장학금을 지급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차츰 장학생 숫자를 조금씩 늘려 갔다.

 

그러는 과정에서 필자가 장학회를 운영하고 있다는 사실이 밖으로 조금씩 알려지게 되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대부분의 지인들은 나를 격려하고 칭찬하며 몹시 부러워하는 분위기였다.

 

그런데도 극히 일부이긴 하지만 필자의 순수한 그런 뜻을 잘 모르는 몇몇 사람들이 “현직 세금쟁이가 장학회를 운영하다니…”라고 비아냥대는 것 같은 눈치였다.

 

그러면서 혹시 뇌물이나 받아 장학회를 운영하는 건 아닌가? 하는 등 좋지 않는 의혹의 눈초리를 보내기도 했었다. 그런 가운데서도 아내와 나는 소리소문 없이 조용하게 석성장학회를 운영해 나갔다.

 

그러면서 아내가 나에게 가끔 들려준 말이 있다.

 

“여보! 남들이 무엇이라 말하든 말든 괘념치 말고 열심히 운영하다 보면 언젠가는 우리의 진심이 통할 날이 올 거예요. 석성장학회! 파이팅입니다!”

 

<계속>-매주 水·金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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