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금에 관한한 거의 '문외한(門外漢)'이라고 밖에 할 수 없는 안무혁 국세청장은 자신의 세금무지(無知)를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았다. 대신 직원들에게 '세금학습'을 부지런히 받았다.
그는 공 사석에서 국세청 주요 간부들에게 '알다시피 나는 모른다. 그러니 잘 좀가르켜 주시오'를 연발했다.
청장이 이렇게 몸을 스스로 낮추고 나오니 잔뜩 긴장해 있던 국세청 간부들은 오히려 당황스럽기까지 했다.
안 청장의 의중을 알아차린 직원들은 청장이 세금에 대해 물어 오면 최선을 다해 학습시켰다. 그러는 사이 안무혁 청장은 어느새 '국세청 맨'이 다 돼가고 있었다.
'친절운동'을 선봉에 내 세운 국세청은 여세를 몰아 안무혁 청장 취임 한달 여만에 '영수증주고받기 생황화 운동'을 정부차원에서 전개한다. 영수증 주고받기를 '범국민의식개혁 운동'으로 끌어 올린 것이다. 물론 '안무혁'의 힘이 정부각 부처에 고루 통용될 수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 무렵, 정치적으로는 사형선고를 받고 복역중인 김대중 씨를 신병치료 명복으로 도미를 허용하는 등 일부 유화책도 나왔으나 '민주화 갈망세력'에게는 조족지혈이었다.
정부는 1983년 1월 1일을 기해 고위공직자 재산등록을 의무화 하는 '공직자윤리법'을 발효 시키는 등 '민심달래기'에 안간힘을 쏟는다. 그러나 집권자체가 비정상이었기에 전두환 대통령은 이른바 민주세력들에 의해 늘 '타도대상'이었고, 그로 인한 정치·사회혼란은 날로 더해만 갔다.
암울한 정치 상황과는 달리 국세행정은 '안정'을 구가했다. 그 이면에는 청장을 중심으로 똘똘 뭉친 '결속'이 자리잡고 있었다. 보수성과 패쇄성이 강한 국세청 조직이 '외부인 청장' 안무혁에 대해 마음을 열게 된 데에는 공직사회의 권력지향 성향이 반영된 측면도 있었지만, 그보다 '인간 안무혁'의 진 면목이 조직 내부에 급속히 전파됐기 때문이라는 견해가 많다.
안무혁 청장 초창기시절 안 청장이 주재한 간부회의를 마치고 나 온 모 국장이 다른 간부들과 함께 복도를 걸어가며 혼잣말 비슷하게 '뭐 알지도 못하면서 사사건건…, 전방(前方)에나 가 있을 일이지…, 앞으로 많이 힘들게 생겼네'.-서너발짝 앞서 가면서 이 푸념을 들은 A 국장은 자기방에 들아가자마자 후배이자 아끼는 처지였던 '푸념 국장'을 따로 불렀다. "어이 ㅇ국장 말조심해. 내가 보기엔 청장님 말씀이 하나도 틀리지 않았네. 고칠것은 고쳐야지. 부임한 지 1년도 안 된 분이 그 정도로 핵심을 파악하고 있다는 게 나는 오히려 놀라웠네"-
문제의 '푸념 국장'은 안무혁 청장에 대한 자신의 넋두리가 그렇게 싸늘하게 대접 받을 줄은 몰랐다고 본 기자에게 토로한 적이 있다. 작은 해프닝에 지나지 않지만 이 광경은 안부혁 국세청장 초창기 국세청 내부의 복잡한 정서와, 그가 어떻게 방대한 국세청 조직을 장악해 나갔는 지를 엿 볼 수 있다. <계속>
<서채규 주간> seo@taxtime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