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모 한장으로 언론사 세무조사 덜컥 발표? 울컥
-세금쟁이 현직에서 가장 자존심 상한 날-
21세기 밀레니엄 두번째 해가 되는 2001년초, 필자는 개나리 봇짐(?)을 들고 새로운 근무지가 될 국세청 공보관실 문을 두드렸다.
그동안 필자는 일반 세금쟁이들과 같이 세금을 매기고 거두어 들이는 정통 세금쟁이였으나 이제는 언론사를 상대하는 일만을 맡게 되었다. 비록 몇개월동안 영등포 서장으로서 방송3사를 자주 접촉해 왔었지만 어디까지나 부수 업무였다. 그러나 이제는 주된 업무가 되었다.
어떤 때는 국세청 입장을 대변해야 하고 또 어떤 때는 언론사의 입장에 서 주어야 하다 보니 ‘절반은 세금쟁이, 절반은 기자’ 신분이었다.
부임 첫날부터 매일매일의 국세청 관련기사를 살펴보고 또 틈날 때마다 출입기자들과 그들의 데스크, 더 나아가 편집 책임자에게까지도 부임인사를 하다 보니 정말 눈코 뜰 새가 없을 정도였다.
참고로 당시 중앙 언론사로는 통신사, 중앙 일간지와 경제지 그리고 방송사를 포함하여 모두 23개나 되었다. 하나하나 면면을 살펴 보니 나름대로 특성들이 있었기 때문에 어느 하나라도 가볍게 볼 수 없었다.
그러다 보니 각 언론사에서 파견된 출입기자 한사람 한사람이 나에게는 매우 소중한 존재였다. 왜냐하면 이들을 통해야만 소속 언론사를 보다 빨리 파악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바쁘게 한 달을 보내던 어느 날인가? 지금 기억으로는 1월 마지막 날인 것으로 기억된다. 그 날 점심은 어떤 신문사 편집국장과 경제부장과 함께 했다. 상견례를 겸해서 아주 편안한 마음으로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시작으로 국세청의 현안 문제까지 설명드리면서 즐겁게 식사를 했다. 정말 유익한 시간이었다. 식사를 마치고 국세청 사무실로 되돌아 왔다.
그런데 갑자기 기자실이 왁자지껄해졌다. 온통 난리(?)가 난 것이다. 그러면서 출입 기자들이 떼를 지어 나에게 몰려 왔다.
“공보관! 정말 이럴 거예요? 우리와 무슨 원수 맺을 일 있어요?”
“전 기자! 무슨 일을 가지고 그렇게 화를 내는 거야? 일단 무슨 사연인지 이야기를 해 봐.”
연령으로 보면 대부분 조카뻘 되는 기자들이라 나도 그만 화가 나서 반말을 했다. 다짜고짜 그 기자는 메모지 한장을 나에게 건네 주었다.
자기 부서 데스크(팀장)에게 보내는 기사 송고문이었는데 ‘국세청, 전국 23개 중앙언론사에 대한 특별 세무조사 실시’ 라는 제목만이 달랑 기재되어 있었다.
참고로 통신사는 통상적으로 다른 언론사보다 먼저 보도가 나가야 하는데 이렇게 제목만을 송고했으니 그것도 다른 신문사보다 늦게…, 정말 어처구니 없는 일이었다. 나는 그들에게 말 한 마디 못하고 즉시 국세청장실로 달려갔다.
“청장님! 제가 공보관 맞습니까? 지금 출입 기자들이 난리가 났습니다. 담당 공보관도 모르는 일을 이렇게 개별적으로 불러 발표해도 되는 겁니까? 진짜 저를 못 믿으시는 겁니까? 그러시면 다른 사람으로 바꾸어 주십시오. 제 수십년 공직자 생활 중에 이렇게 심한 모멸감은 처음 느껴 봅니다.”
두서 없이 국세청장께 항의했다.
“공보관! 오전 중에 담당국장한테서 연락 못 받았어?”
“못 받았습니다.”
“뭣? 못 받았다고? …. …. …”
그 분도 한동안 말이 없으셨다. 나는 아무 말 없이 국세청장실을 빠져 나와 기자실로 되돌아 왔다.
그리고 “기자 여러분, 정말 송구스럽습니다. 아마도 이번 일이 너무 중대하다 보니 저도 안 거치고 여러분에게 개별적으로 통보한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 통신사 소속기자에게 더 미안합니다. 나도 이런 모멸감은 처음 느껴 봅니다.”
그러자 흥분 상태에 있던 기자들이 각자 제자리로 돌아갔다.
그 때 갑자기 불과 1시간 전에 맛있게 점심식사를 하다가 헤어진 편집국장과 경제부장이 머리에 떠올랐다. 그리고 심한 죄책감까지 들었다. 지금쯤 그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나는 그 날 오후 그 악몽과 같은 순간들을 정말 괴로운 마음으로 흘러 보냈다.
지금 솔직하게 고백하지만 그때 느꼈던 심한 자괴감이 은퇴후 오랜 세월 동안 내 마음속에서 좀처럼 지워지지가 않았다. 지금도 그 때를 생각하면 순간적으로 울컥 화가 나기도 한다.
당시 국세청 수뇌부들에게도 말 못할 사정은 있었겠지만 “한 두시간 후면 온 세상에 다 알려질 일을 보안(保安)을 지킨답시고 담당 공보관까지 제치고 출입기자 한명 한명을 불러 개별적으로 통보를 했다니….”
나는 지금도 그때 그 일들을 잊을 수가 없다.
<계속>-매주 水·金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