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대망의 새해, 쏟아지는 집단민원들
99년 세모와 함께 20세기가 저물고 드디어 대망의 새천년 2000년대가 열렸다. 2000년대의 첫 해인 2000년은 21세기 100년의 첫 해이기도 하여 나라 곳곳에서 새천년, 새 세기를 축하하며 축복하는 갖가지 행사가 열렸다.
정치적으로도 의미있는 큰 일들이 있었다.
그 해 6월13일 김대중 대통령은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평양에서 남북정상회담을 하고 6·15남북공동선언문을 채택했으며, 이 일로 김 대통령은 그해 연말 노벨평화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국세청은 지난해 추진한 세정개혁의 성과가 가시적으로 나타남에 따라 공공부문 혁신수범기관으로 평가를 받고 더 열심히 개혁프로그램의 정착을 위해 매진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본청 개인납세국은 종전의 간세국, 직세국, 재산세국의 업무를 관장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해관계 당사자나 시민단체로부터 제기된 집단성 민원 또는 사회적으로 예민한 과세 이슈가 끊이지 않았다.
공동주택위탁관리업에 대한 과세문제, 아파트 청소용역에 대한 과세문제, 버섯 재배사업자에 대한 소득세 과세문제, 가락동 농수산물시장 중개도매업자에 대한 계산서 미제출 가산세 부과문제, 부산시 양산구 웅상면 택지개발구역내 농지에 대한 양도소득세 과세문제, 전남 무안신공항부지내 부동산 양도소득세 과세문제, 삼성SDI 보증사채(BW) 발행에 대한 과세문제 등 쉽게 결론을 도출하기 어려운 세무민원이 유난히 많았다.
이들 민원은 그 집단적 성격이나 사회적 관심도가 높아 정치적으로도 매우 민감한 사안들이기도 하였다.
우리는 연중 내내 청와대, 재경부, 감사원, 국회 등 유관기관과 해당 사업자단체 또는 시민단체의 대표들과 수시로 만나 대화로 소통하면서 결국 법과 상식의 테두리내에서 한건 한건 해결의 실마리를 풀어나갔다.
사업자단체들은 집단시위를 예고하며 유리한 협상고지를 점하려고 했으나 해를 넘겨가며 서로 대화하는 가운데 대부분의 민원을 큰 물의없이 처리했다.
대법원과 헌재의 해묵은 갈등을 해결하다
2000년에 국세청이 움직여서 해결의 단초를 열었던 일 가운데 꼭 기록으로 남기고 싶은 하나의 특별한 일이 있다.
그것은 부동산 투기거래에 대한 실지거래가액(실가) 과세문제를 둘러싸고 대법원과 헌법재판소(약칭 ‘헌재’)가 각기 상반된 판결(결정)을 함에 따라 발생한 양 기관의 위상에 관한 문제였다.
대법원은 부동산 투기거래에 대하여는 실가과세가 가능하다고 하여 국세청의 손을 들어 주었으나, 헌재는 실가과세 규정이 법에서 위임한 근거가 없는 규정이라는 이유로 국세청의 실가과세에 대하여 한정위헌결정을 했던 것이다.
즉 헌재는 납세자의 손을 들어줬다.
헌재의 헌법소원에서 승소한 납세자는 그동안 국세청과 세무서를 수없이 찾아와 왜 헌재 결정에 따르지 않느냐고 항의하다가 끝내는 관할세무서장을 고발하는 사태로까지 번졌다.
그러나 국세청으로서는 두 기관의 어느쪽 입장도 따를 수 없었다.
대법원의 판결을 따른다면, 헌재의 존재가 무의미해지며, 헌재의 결정을 따르면 사법체계가 3심제가 아니라 4심제가 되면서 헌재가 대법원의 상위기관이 되는 결과가 돼 자칫 우리나라 사법체계에 큰 혼란이 초래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양 기관에 소송계류 건수는 22건(대법원 18건, 헌재 4건)이었고 소가(과세금액)는 약 250억 원이었다.
양 기관의 대립 갈등상황은 5년 이상 지속되어 왔으나 어느 한쪽이 자기 결정을 번복하지 않는 한 해결방안이 없었고, 어느쪽도 결정을 번복할 가능성은 기대할 수 없었다.
이러한 상황 하에서 2000년 7월에 종전의 대법원장(당시 윤관원장)과 대법관이 교체되고, 9월에는 헌재의 재판소장(당시 김용준 소장)과 재판관들이 교체되는 시기가 됐다.
대법원의 수석재판연구관 김용담 부장판사(그해 법원행정처 차장이 됨. 후에 대법관 역임)와 헌재 연구부장 서기석 부장판사(現 헌법재판소 재판관)는 각각 자기가 속한 기관으로부터 전권을 위임받아 양 기관의 갈등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대법원 재판연구관을 지낸 두 분은 서로 신뢰했고 나도 조세소송 문제로 이전부터 이 두분과 잘 아는 사이였다.
2000년 6월부터 12월까지 나는 수시로 두 기관을 방문하여 두분과 이 문제 해결의 묘안을 논의했다.
최종 결론은 국세청이 일괄결정 취소하는 방안이었다.
소송계류분 전체를 일괄취소하여 문제해결
청장은 처음엔 이 제안에 반대하였으나 이 문제에 대한 책임을 담당국장인 내가 지기로 하고 권한을 위임받았다.
나는 헌재를 설득해 이 문제에 대한 헌재의 의견을 국세청과 감사원에 공문으로 통보해 줄 것을 요구했는데, 헌재는 고심 끝에 요구를 수락했다.
우리는 별도로 감사원의 양해를 구했다.
다행히 95년 헌재의 부동산투기 실가과세에 대한 한정위헌결정이 있자 재경부 세제실은 투기거래에 대한 실가과세 근거 규정을 입법사항으로 보완하였기 때문에 96년 이후 과세분부터는 투기거래에 대한 실가과세로 소송이 제기된 사례는 한 건도 없었다.
우리는 그해 12월 말일자로 양 기관에 계류 중인 소송 건을 모두 일제히 일괄 취소하도록 함과 동시에 해당 사건 소송대리인으로 하여금 소취하서를 제출하도록 했다.
이 작업은 마치 군사작전하듯 은밀한 가운데 일사분란하게 진행됐다.
2001년 새해 1월 세계일보가 새해 첫 신문 1면 톱 특종기사로 이 내용을 보도했다.
그리고 다른 매스컴에서는 이 일을 더이상 다루지 않았다.
만약의 경우에 대비하여 헌재와 협의하여 보도해명자료까지 만들어 두었는데 한 신문에서 특종으로 다룬 덕분에 다른 매스컴에서는 그냥 넘어갔다.
이 일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당시 국세청에서 헌재에 파견한 신세균 서기관이 중간역할을 잘해 주었으며, 일괄 취소할 때의 비밀작전은 마지막 소취하서를 최종 확인하기까지 당시 재산세과 김보현 과장(후에 대전청장 역임)이 용이주도하게 완수했다.
이로써 두 헌법기관 간의 각기 다른 판결로 빚어진 갈등은 일단락이 되었고 양 기관은 다시는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특별히 유념하는 합의를 하였다.
2001년 봄 당시 헌재소장(윤영철 소장)은 그의 사무실에서 나에게 조그마한 선물을 건네면서 이 일의 원만한 마무리에 대해 특별한 고마움을 표했다.
<계속>-매주 月·木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