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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독하기 2025.06.21. (토)

내국세

[연재]"내 아들이 '우리 아버지 언제 죽지?' 큰 충격"

-'나는 평생 세금쟁이'-(42)

 ‘아버지 학교’에 입학한 ‘일벌레’ 세무서장

 

 

 

필자가 50대 중반 나이에 이곳 영등포세무서장으로 오기까지 30여년 동안 오로지 직장 일에만 매달려 온 탓에 드디어 집안에서 문제가 터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라 오랫동안 곪아온 상처가 터진 것이다.

 

당시 필자에게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삼수(三修)를 하는 아들과 재수(再修)를 하는 딸이 있었다.

 

결론적으로 필자는 남들이 좀처럼 경험하지 못한 오수(五修)를 한 자녀의 아버지가 된 셈이다.

 

무엇보다 문제는 아들이었다. 고등학교 다닐 때 아주 우수하지는 못했지만 그런대로 공부를 잘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이상하게도 결과가 좋게 나오지 않는 것이었다.
필자가 보기에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내가 고등학교를 다닐 때는 어렵게 가정교사를 하면서도 3년 개근상을 탈 정도로 열심히 노력했었는데…. 그래서 어떤 때는 화도 내고 매질을 할 때도 더러 있었다. 세상 부모들 다 똑같은 심정이겠지만 필자도 정말 가슴이 답답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퇴근해서 집에 와보니 아내가 나에게 심한 핀잔을 주었다. 그러면서 메모지 한 장을 건네면서

 

“당신! 도대체 아들에게 어떻게 했길래 이런 낙서가 쓰였어요?”
 “우리 아버지 언제 죽지?”

 

나는 깜짝 놀라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날 밤새 고민을 하고 있는데 아내가 나에게 한가지 제안을 했다.

 

“당신, 이 참에 동부이촌동에 있는 어떤 교회에서 ‘아버지 학교’를 운영하고 있는 모양인데 등록금을 대줄 테니 다녀오세요”라는 것이었다.

 

나는 꽤나 고민했다. 그런데 다행히도 그 ‘아버지 학교’는 매주 토요일 오후 5시부터 11시까지 6시간씩 5주간만 운영을 한다는 것이었다. 어쩔 수 없이 아내에게 가겠다고 약속은 했지만 불안했다.

 

아들의 수능시험이 백일 정도 남은 8月末경으로 기억된다.

 

 

 

첫 주에는 오리엔테이션, 둘째 주에는 아버지께 편지쓰기, 셋째 주에는 아들에게 편지쓰기와 ‘아들이 자랑스러운 20가지 이유’ 쓰기, 넷째 주에는 아버지의 역할 실습, 그리고 마지막 다섯째 주에는 아내와 함께 하는 졸업식 등으로 되어 있었다.

 

 

 

 

50대이상 아버지들은 이른바 ‘새마을운동 세대’다. 조용근 천안함재단 이사장 역시 경제개발이 한창이던 당시 먹고 사는데 바빠 가정에 신경쓰기 어려웠던 우리 사회의 자화상이다. 쓰라린 경험을 통해 가정 화목의 중요성을 깨달은 조 이사장은 공자의 ‘근자열 원자래’의 의미를 설파하고 있다.<2001년 3월, 아들 성제가 서울대 입학식에서 신입생을 대표하여 선서하는 모습>


솔직히 고백하지만 필자는 그때까지 아버지의 역할이 무엇인지를 잘 몰랐다. 그냥 자녀들의 등록금이나 대주고 직장 일에만 열심히 하면 되는 것으로 알고 있었으며 자녀 문제는 아내가 알아서 하는 것이라고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었다. 아들의 장래를 위해 꿈을 키워주고, 잦은 스킨십을 통해 사랑으로 키워야 했는데 그동안 직장 일에만 매달려 아들과 추억 한번 없는 이름만 아버지이지, 어찌 보면 남남이나 다름없는 사이로 지내지 않았나?하고 많은 후회를 하게 되었다.

 

나의 피붙이면서 또 내 대(代)를 이어갈 외아들인데, 이처럼 소중한 아들을 그냥 방치해 두었으니….

 

특히 무학자인 아버지로부터 그런 교육을 한번도 받아본 적 없었던 필자가 아들에게 그런 교육을 전수할 리 만무했다. 그래서 아버지에게 원망도 많이 했다.

 

참고로 내가 청소년때 아버지는 평소에는 말이 없는 분이셨다. 그런데 술만 자시면 성격이 완전히 변해 밥상이 날라가고 어머니를 때리고 심지어 우리에게까지 손찌검하시는 때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우리 집 앞에 있는 초등학교 운동장을 돌면서 혼자 수없이 외쳐대는 말이 있었다.

 

“아! 우리 아부지 언제 죽노?”

 

그 고백이 내 몸에 깊이 배여 먼 훗날 아들에게까지 전수되었으니 아마도 이것도 부전자전이 아닌가 싶다.

 

그 충격으로 어머니는 내가 군대에 있을 때인 72년 겨울, 젊은 52세의 나이로 돌아가셨다. 어머니 돌아가신 후 아버지도 몹시 괴로워하셨다. 남편으로서 또 아버지로서 역할을 제대로 못해주어 늘 괴로워하시다가 84년도 한해가 저물어가는 마지막 날에 어머니 곁으로 가셨다.

 

그 후 필자는 정말 가난하고 사회로부터 제대로 대접 한번 받아보지 못한 두 분을 기리기 위해 아버지 가운데 글자 ‘석(石)’와 어머니의 가운데 글자 ‘성(成)’을 합쳐 ‘석성(石成)) 장학회’를 만들었다.

 

그 애틋한 사연이 담긴 석성장학회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자세히 나누었으면 한다.

 

아버지 학교 3주째 되는 날, 나는 아들에게 편지를 쓰면서 내가 겪었던 청소년 시절과 20세 약관의 나이에 애송이 세금쟁이가 된 기막힌 사연들을 솔직하게 썼다.

 

여기에다 정말 고생 고생 끝에 쓴 “아들아! 네가 사랑스런 20가지 이유”도 함께 써서 아버지 학교에 제출했더니 아버지 학교에서는 그것들을 내 아들의 주소(?)로 보냈다.
어느 날 퇴근해서 집에 와 보니 아들의 방문이 잠겨 있었다.

 

궁금해서 아내에게 물어보니 글쎄 웬 우편물을 받고는 자기 방에서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아마도 아들은 내가 쓴 편지를 읽고 마음에 큰 충격을 받고 많이 운 것 같았다.

 

다음 날 아침 일찍 출근하려는데 갑자기 아들이 내 가슴에 확 안긴 것이다. 한동안 나는 아들을 껴안고 많이 울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 때부터 도시락을 두개씩이나 싸들고 다니는 그 아들과 화해를 했다.
무엇보다 그 아들은 아버지인 나로부터 인정을 받아서인지 몰라도 자기가 원하는 대학교에 당당히 합격했다. 기적의 순간들이었다.
그 때 필자는 많은 것을 느꼈다. 이 세상 아버지들에게 특히, 세금쟁이 아버지들에게 감히 고하고 싶다.
“아무리 세금쟁이 일도 중요하겠지만 먼저 가족들과 화해하라. 그리고 화목해라, 집안이 편해야 세금쟁이 일도 편하다”

 

 

 

<계속>-매주 水·金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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