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성군수 한번 출마해 볼 걸 그랬나?’
1년6개월간의 농촌 생활(1) –
그러면서 필자는 지난 30년 가까운 세금쟁이 생활을 되돌아 보았다. 그저 출세하고픈 일념(一念)에 가족보다는 사회적 신분에 더 신경을 쓰게 되었다. 그 결과 국세청 서기관이라는 사회적인 신분은 얻었지만 가족과의 관계가 점점 망가져 가고 있었다.
그런 상태에서 갑자기 혼자서 시골로 내려가게 되니 무엇보다 아내에게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또 학업에 열중하고 있는 아들과 딸 곁에 있어 주어야 하는데….
또 내 개인적으로도 갑작스런 환경 변화에 불안하기도 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눈코뜰 새 없을 정도로 바쁘게 지내 오다가 갑자기 할 일없이 사무실에서 멍하니 혼자 있자니…. 그렇다고 세무서장이 직원들과 함께 한 사무실에서 머리를 맞대고 직접 일할 수도 없었다.
또 원체 시골이다 보니 가끔 관내 유관기관장들과 만나서 회식하는 일 외에는 만날 사람도 없었고 딱히 내가 나서서 지원해야 할 일도 없었다.
무엇보다 연간 100억원도 되지 않는 세수 확보문제도 군청을 비롯한 각급 관공서와 학교 선생님들이 내는 근로소득세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어 별로 신경쓸 필요도 없었다.
그래서인지 직속상관인 대구지방국세청장께서도 직원들 관리에만 신경써 달라는 것밖에 달리 지시할 것도 없었다.
또 퇴근후 가질 마땅한 취미거리도 없었다. 연습장 하나 없는 전형적인 농촌지역이다 보니 골프 연습은 아예 생각할 수도 없었다. 그렇다고 몇십키로 떨어진 인근 도시로 나갈 수도 없는 터였다.
한마디로 이곳 세무서장은 그동안 고생한 대가로 승진해서 이 곳에서 잠깐 쉬었다가(?) 다시 다른 곳으로 가는 일종의 경유지(?) 같은 시골 세무서로 보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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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번째 세무서장 부임지는 연간 100억원이 되지 않는 조그마한 시골 세무서인 의성세무서였다. <1997년 의성세무서장 당시 의성세무서 앞에서> |
형편이 그렇다 보니 무엇보다 직원들이 다른 마음먹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했다. 그래서 필자는 내가 겪었던 지난 날들을 생각해서라도 직원들을 편안하게 해주고 싶었다.
한달에 한번씩은 전 직원이 세무서 잔디마당에서 삼겹살 파티를 하면서 서로의 마음을 나누게 했다.
그 달에 가장 모범적인 직원을 자기들 스스로 뽑게 해서 이틀간의 휴가와 함께 격려금까지 주는 ‘이달의 의성인(義城人)’을 선발, 격려해 주기도 했다.
또 매월 마지막 수요일 오후에는 ‘체육의 날’로 지정, 야간 산행을 하면서 한마음으로 단합하게 했다.
기숙사에 기거하고 있는 직원들에게는 다른 마음먹지 말고 세무사 공부에도 열을 올리게 했다.
이렇게 자주 직원들과 함께 하는 시간을 많이 갖다 보니 직원들이 나를 큰 형님이나 삼촌같이 대해 주었다. 또 각자가 갖고 있는 고민들을 털어 놓게 하고 또 내가 해결할 수 있는 것이라면 빨리 해결해 주기도 했다. 그렇게 하다 보니 나도 퍽이나 즐거웠다.
그래서 주말이면 아무런 스트레스 없이 중앙선 열차를 타고 서울로 올라가거나 아니면 검찰 지청장과 함께 예천공항에서 비행기를 타고 올라갈 때도 있었다. 내려올 때는 일요일밤에 청량리 역에서 출발하는 중앙선 야간열차를 이용했다.
이렇게 일보다는 직원 단합하는 일을 1년 이상을 하다 보니 국세청 본청에서 몸을 던져 가면서 밤낮없이 열심히 일하던 내 모습이 점점 사라져 가고 있었다. 그래서 상급기관에 다른 곳으로 보내줄 수 없느냐고 했더니 나는 곧바로 서울로 올라올 사람이기 때문에 이곳에서 1년 이상 근무를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도 관내에서는 “조용근 세무서장이 이번 의성군수 출마에 뜻이 있어서 일부러 다른 곳으로 가지 않는다” 라는 유언비어가 나돌았다.
그 배경에는 당시 필자가 관내 납세자들과 유지들로부터 평판이 좋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어느 날 당시 정해걸 군수께서 조용히 좀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참고로 당시 정해걸 군수의 며느리가 의성세무서에 근무하고 있어 정 군수와 나는 ‘우리는 사돈(?) 관계’ 라고 가끔씩 농담을 주고 받기도 했었다.
“조 서장! 이번 군수 선거에 진짜 출마할 거요?”
나는 빙그레 웃으면서 “세무서장이라고 군수 출마 못하란 법이 있습니까?”
그러면서 정 군수에게 내 입장을 이야기해 주고, 재선이 꼭 성공되기를 빈다고까지 말해 주었다.
그 이후부터 정 군수는 명절 때가 되거나 아니면 모처럼 서울집으로 올라갈 때는 꼭 인근 정육점에 가서 한우고기 몇근씩을 사서 나에게 보내 주었다.
이렇게 산골에서 재미있게 보내다 보니 어느덧 1년6개월이란 세월이 흘렀다.
98년 1월.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자마자 나는 서울지방국세청 재산세 조사과장으로 발령받게 되었다.
“그 때 의성군수에 한번 출마해 볼 걸.”
-매주 水·金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