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선 실무직원들로부터 배우다
무릇 행정부처의 국장이란 해당 행정분야에서 직업공무원으로서는 최정상에 있는 전문가이어야 한다는 것이 나의 평상시 생각이었다.
나는 재산세국장으로 발령을 받고 보니 막상 무슨 일을 해야 할 지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우선 나는 당장 일선의 애로사항이 무엇이며 제도면이나 행정면에서 개선해야 할 사항이 무엇인지를 알고 싶었다.
나는 강남 某세무서 재산세계장 등 재산세 실무에 종사하는 직원들과 저녁식사를 나누면서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들었다.
다음날 아침 나는 전날 저녁에 청취한 의견들을 메모하면서 국장으로서 해야 할 일들의 우선순위를 정하였다.
일선 세무서 재산세과 역시 처리할 업무량이 과다한 실정이었다. 양도, 상속․증여 과세자료를 전산실에서 출력해 일선에 쏟아 놓으면 직원들은 평상시 미결자료 때문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다.
그 대표적인 것 중의 하나가 재산취득 자료에 대한 우편통지제도였다.
전산실에서 부동산 등기자료를 입력하고 이 중 재산취득 자료를 연간 40만건 정도 출력해 1부는 해당 납세자에게 1부는 관할세무서로 내려 보냈는데 나중에 최종적인 자료 처리 결과를 보면 과세 건수는 0.1%도 되지 않은 것으로 분석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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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대 말 국세행정의 가장 큰 골칫거리 가운데 하나는 재산세업무였다. 당시 재산세업무는 우편자료처리가 대부분이었다. 국민들의 양도, 상속, 증여 등 부동산 거래 자료를 전산실이 취합해 일선에 내려보내면 일선에서는 이에 대한 과세여부를 우편으로 확인해야 했는데, 자료의 99%가 비과세 자료였다. 한마디로 일선세무서는 ‘영양가 없는 일’에 엄청난 행정력을 쏟았던 것이다. 사진은 당시 한 일선세무서 재산세과 직원들이 부동산 거래자료 분류작업을 하고 있는 모습<세정신문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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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산취득 자금출처자료 연 40만건을 5천건으로 줄이다
나는 재산취득 우편통지서가 납세자들에게 내려가면 납세자는 누구나 할 것 없이 어떻게 하면 자금출처를 소명할까 겁부터 먹기 마련이고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라는 걸 익히 알고 있었다.
이렇게 저렇게 알아보고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세무서 담당자를 만나서 준비한 자료를 내놓고 눈치를 살펴야 하는 그런저런 과정을 거쳐 결국은 전체 출력자료의 99.9%가 비과세 처리되고 있었다.
그렇다면 사전에 전산실에서 99.9%의 자료를 출력하지 않는 방안은 없을까를 검토했다.
소득세 신고가 돼 있는 자, 자산처분 양도소득 신고가 돼 있는 자, 자금출처 배제기준 해당자 등을 제외하기로 결정하고 감사원의 사전 양해를 얻었다. 이렇게 하여 재산취득 자료우편통지제도를 폐지했다.
그 결과 연 40만건 출력자료가 5천건으로 줄어들었다.
또한 대상자료는 일선에 직접 하달하지 않고 해당 지방청에서 1차 검증을 거쳐 걸러내고 꼭 조사할 필요가 있는 소수의 자료에 대해서만 취득자금 출처조사를 하도록 함으로써 업무량 감축은 물론 납세민원과 세정 정화에도 크게 기여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일은 그로부터 1년후 내가 국세행정개혁단장이 됐을 때 모든 세목의 전산출력자료를 획기적으로 감축시키는 작업의 도화선이 된 첫번째 성공사례가 됐다.
이와 함께 증여세 자금출처 배제기준도 대폭 현실화해 불필요한 세무간섭을 줄이면서 업무량도 감축하도록 했다.
나는 이런 식으로 재산제세 행정 개선방안을 마련한 후 청·차장의 결재를 얻어 시행했는데 이전에 본청 재산세 과장을 지낸 바 있는 청장께서 이제 재산세 행정에 대해 안도하는 눈빛을 읽을 수 있었다.
대법원과 헌재의 자존심 싸움사이에 낀 국세청
98년6월22일 오후에 나는 헌법재판소를 방문해 권오곤(權五坤) 연구부장을 만났다.
권 부장은 나에게 95년11월30일 헌재에서 헌법불합치결정을 한 구 소득세법 제60조(실거래가액에 의한 양도세 과세조항)를 왜 국세청에서는 계속 적용해 과세하느냐고 따졌다.
한마디로 헌재의 결정을 무시하는 부과처분을 왜 계속하느냐는 것이었다.
당시 대법원에서는 동일한 사안에 대해 헌재와는 상반된 판결을 해오고 있었다.
부동산 투기거래에 대해서 대법원에서는 실지거래가액을 조사해 과세할 수 있다고 판결했으나 헌재에서는 법의 위임이 없이 시행령상의 규정으로 실제거래가액으로 과세하는 것은 부당하다며 기준시가 이상으로 과세하는 것이 헌법에 합치되지 않는다는 결정을 했던 것이다.
그러나 국세청으로서는 두 헌법기관이 통일된 과세기준을 내려 주지 않는 한 어느쪽 의견도 따를 수 없는 입장이었다.
이 문제는 두 기관이 대립된 상황에서 해결의 실마리를 못 찾고 당분간은 그대로 넘어갈 수밖에 없었고, 두 기관에 소송을 제기한 납세자들도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답답한 상황이 계속되었다.
뜻하지 않은 시기에 활짝 열린 문
나는 국회, 청와대, 재경부, 감사원, 헌법재판소, 언론사 등 업무와 관련이 있는 대외기관들의 관계자를 틈나는 대로 만나는 한편 대내적으로는 자나 깨나 재산제세업무 개선을 위해 고심하는 중에 어느새 석달이 지나갔다.
98년 6월 30일 오후 안정남(安正男) 차장이 나를 불렀다.
안 차장은 거두절미하고 ‘광주청장 자리가 비었으니 내려 가겠느냐’고 물었다. 내가 ‘언제 말입니까?’라고 했더니 ‘내일 가야 돼’라고 하였다.
나는 결정해 주시는 대로 내려 가겠노라고 말했다.
그로부터 몇분후 이건춘 청장께서 전화로 ‘장 국장 재산세국은 이제 별 문제없겠지요?’라고 하여 나는 ‘얼마전 청장님께 보고드린 대로 하면 누가 오더라도 괜찮을 것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이렇게 전광석화처럼 전혀 예상하지 않은 시기에 나는 광주지방청장으로 발령을 받았다.
<계속>-매주 月·木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