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원 박사들과 함께 해외연구여행을 떠나다
내가 연구원에 파견돼 있던 97년 나는 젊은 박사들과 함께 연구 프로젝트팀에 동참해 두차례나 해외출장을 했다.
한번은 현진권(玄鎭權), 배준호(裵俊皓), 노영훈(魯英勳) 박사와 함께 싱가포르, 뉴질랜드, 일본의 국세청을 방문해 세무행정 운영의 이모저모를 살펴 봤다.
싱가포르과 뉴질랜드는 우연하게도 미국의 세정운영체제를 그대로 도입해 시행하고 있었다. 두 나라가 다 미국의 한 회계법인에 컨설팅 용역을 줘 미국의 국세행정 조직과 운영체계를 그대로 설계하도록 했다는 것이었다.
일본 국세청에서 보고 듣고 느낀 점은 일본은 조직이나 일하는 방식에 있어서 급격한 변화보다는 점진적인 개선을 선호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고 역사적인 전통을 매우 소중하게 여긴다는 것이었다.
예를 들면 일본에는 고장마다 전통술이 다양하게 발달돼 있는데, 지방청 단위마다 매년 좋은 술 품평회를 개최해 주류산업을 발전시켜 나가고 있었다. 이런 점은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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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년은 국가적으로 대사(大事)가 많은 해였다. 사상 처음으로 외환위기를 맞아 국가가 부도나기 일보 직전까지 내 몰렸는가 하면 대통령 선거가 있었다. 그 해 12월17일 치러진 제15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김대중 후보가 당선 됐다.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는 당선되자마자 IMF환난을 극복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면서 사실상 정국을 주도했다. 사진은 대통령 선거일을 20여일 앞둔 ’97년11월28일 서울 남대문 시장에 들른 김대중 후보가 시민들의 환호에 손을 들어 답례하고 있는 모습. <세정신문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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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방명주 전망대에서 조국의 발전을 기원하다
또 한번은 중국어 소통이 가능한 한상국(韓相國) 박사와 함께 중국 사회과학원 초청으로 베이징, 상하이, 항저우를 방문했다.
베이징에서는 그 유명한 사회과학원 부원장이 친히 우리를 맞이하였고, 저녁 때는 베이징 최고의 고급 오리요리 전문식당인 ‘첸취더(全聚德)에서 풀코스로 우리를 대접해 줬다.
상하이에서 2층 특급열차로 항저우로 갔다. 끝없이 펼쳐진 절강성 넓은 들판을 보며 2시간 남짓 달려 항저우에 도착했다. 항저우 풍경은 깨끗하고 아름답고 활력이 넘쳐 보였다.
오전에 영은사(迎恩寺)를 구경하고 점심 때는 그 부근의 식당에서 동파육(東波肉)을 먹었다. 저녁때 항저우 세무서 간부들과 합류해 농민조합이 설립·운영한다는 큰 호텔 식당에서 풍성한 만찬을 나누고 저녁후에는 볼링게임을 했다. 이들은 모두 자가용차를 갖고 있었고 어느 자본주의 국가의 공무원에 못지 않게 거침없이 자유롭게 행동하였다. 나는 이 곳이 공산주의 중국 땅인가 의심이 들 정도였다.
다음날 아침 일어나 산책하는데 항저우의 명물 서호(西湖) 주변을 빙 둘러가면서 시민들이 조용하게 느린 동작으로 기공체조를 하는 모습이 장관이었다.
우리는 길거리 식당에서 또쟝과 요툐로 아침식사를 때우고 송나라 때 소동파(蘇東波)의 전설이 가득 담긴 서호(西湖) 관광을 끝내고 상하이로 향했다.
상하이(上海)는 동양 제일의 도시의 위용을 뽐내며 완전한 자본주의 경제도시로 탈바꿈돼 있었다. 중국에서 가장 잘 사는 고장답게 가는 곳마다 사람과 물자가 넘쳐나고 백화점에는 사람들이 교행하기가 힘들 정도였고 점포마다 자기 물건 사라고 호객하며 외치는 소리가 요란했다. 사람이 들어와도 멀뚱멀뚱 쳐다만 보고 서있는 수도 베이징의 가게 풍경과는 사뭇 대조적이었다.
와이탄(外灘)에서 건너다 보이는 신개발지역 푸동(浦東)의 고층빌딩들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어느새 놀라움이 두려움으로 변하였다.
97년 11월 당시 외환 고갈로 나라의 디폴트(Default)를 염려하고 있는 상황에 있는 우리나라의 현실과 비교할 때 우리가 너무 약하고 왜소하게 느껴졌다.
상하이의 명물, 푸동에 초고층빌딩인 동방명주(東方明珠) 꼭대기 전망대에 올라 상하이 전역을 한 눈에 내려다 보며 발전하는 중국의 모습을 보고 마음 속으로는 조국 자유대한민국의 미래의 발전을 간절히 기원하였다.
한 박사와 나는 귀국해 지체없이 보고, 듣고, 수집한 자료를 모아 간략한 연구보고서를 냈다.
나라도, 내 개인도 암울했던 97년 세모
97년 12월은 제15대 대통령 선거가 있는 달이었다.
그해 12월17일 제1야당 김대중(金大中) 후보가 여당 후보인 이회창(李會昌) 후보를 누르고 대통령에 당선됐다.
나라의 경제는 IMF 비상관리체제하에서 6·25이래 최대의 국난에 직면하고 있었다.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는 다음해 2월25일 취임을 기다릴 새도 없이 IMF 환난 극복을 위해 그야말로 동분서주했다.
나라가 어려운 이 시기에 나는 공작자 재산등록에 문제가 생겨 공직자윤리위원회에 서야 하는 곤혹스러운 처지에 봉착하게 됐다.
나는 우선 총무처 담당사무관, 과장, 국장에게 내 잘못을 솔직하게 시인하고 그 경위를 사실 그대로 이실직고(以實直告)했다. 담당 사무관은 나더러 자기에게 불리한 것까지도 이렇게 솔직하게 이야기한 사람은 없었다며 윗분들께 잘 말씀드려 보겠노라고 하였다.
12월 27일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위원회에 출석했는데 가장 무섭게 여겨졌던 손봉호(孫鳳浩) 위원께서 한마디도 말씀이 없었다. 결과는 주의 경고하는 것으로 가볍게 끝났다. 이것은 전적으로 하늘의 크신 도움이었다.
<계속>-매주 月·木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