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께 마지막 불효
필자가 본청으로 전입된지 어언 8년이 지났으며, 6급으로 승진한 지도 6년정도 되었을 84년경에 드디어 사무관 승진 준비를 해야 할 기회가 온 것이다.
지금에 비하면 다소 경력이 짧다고 할 수 있겠으나 어려운 본청에서의 8년이상 근무는 그렇게 쉽지 않은 일이라고 본다.
또 비록 그런 기회가 주어진다 해도 계속된 부동산 경기 과열로 인한 투기업무도 계속 늘어가고 있었고, 이로 인해 내가 맡고 있는 양도소득세 업무도 더없이 폭증해 시험 준비는 어려운 환경이었다.
무엇보다 그 동안 국세청에서는 부동산 투기억제업무의 중요성을 실감해 그 해 84년 2월에는 재산세과를 신설해 전 직원들이 부동산 투기 억제 업무에 바쁘게 돌아가고 있는데 나 혼자 별도의 시간을 할애해 시험을 준비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 때 필자는 재산세과 전 직원들을 통틀어 제일 고참(?)이 됐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새로 전입되는 직원들의 눈총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내 생각으로는 빨리 이 자리를 물려주고 하루 빨리 떠나고 싶었는데 그게 그렇게 쉽게 되지 않는 것이었다.
이에 비해 내가 모시고 있는 간부들은 부동산 투기 업무의 산증인으로 내가 자리를 지켜주고 있으니 퍽이나 안심이 되는 모양이었다.
그러면서 나를 별도로 불러 다른 마음먹지 말고 꼭 사무관으로 승진해서 일선으로 나가라고 격려도 해 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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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근 천안함재단 이사장은 한국세무사회장 재임 당시 ‘나눔’에 대한 남다른 소신에 따라 세무사의 사회적 역할을 강조하고 다양한 사회공헌 활동을 펼치며 진정한 사회 환원의 의미를 실천했다<2010년 1월, 북한어린이에게 보낼 우유와 분유 선적 출항식(정창영 전 연세대 총장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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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그 해 10월경 난생 처음으로 사무관 시험에 응시할 기회가 왔다.
그런데 불행히도 이태전부터 식도암으로 투병 중이신 아버지가 그만 식도가 막혀 음식을 삼킬 수가 없었다.
또 평소 아버지 건강을 자주 체크해 주시는 의사 선생님께서도 몇개월 못 사실 것 같다는 말씀을 해주시면서 장례 준비를 하라는 것이었다.
이렇게 되다 보니 시험도 시험이지만 당장 아버지의 병원 입원과 장례 준비도 해야 할 처지에 놓인 것이다.
이런 어려운 형편을 아셨는지 모시고 있던 과장께서는 얼마간의 기회를 줄 테니 사무실 일은 다른 직원에게 인계하고 아버지의 병 간호와 시험공부에 전념해 보라고 배려해 주셨다.
그 대신 급하게 연락할 일이 있으면 언제든지 빠른 시간 안에 사무실로 들어 올 수 있도록 하라는 것이었다. 고맙고 감사했다.
아마 이러한 배려는 그동안 조직을 위해 불철주야 몸을 던져 일한 것에 대한 보상이라고나 할까?
그래서 나는 시내 중심가에 있는 백병원에 아버지를 입원시켜 드리고, 인근 여관을 빌려서 틈틈이 책과 씨름하고 있었지만 좀처럼 집중이 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끝내 병원으로부터 아버지를 모시고 나가라는 최후통첩을 받았다.
할 수 없이 2년전 아버지의 발병으로 구의동 단독주택을 팔고 이사온 송파에 있는 방 3칸짜리 아파트로 모셔서 마지막을 준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식도로 음식물이 들어가지 않아 병원에서 식도를 절단하고 새로 만든 고무호스를 통해 입에서 바로 뱃속으로 흘려 보내도록 임시 장치를 해주었지만 그것도 얼마간에 불과했다.
그 때 아버지께서는 얼마나 고통스러우셨을까?
그런 상태로 하루 이틀을 보내고 있을 즈음, 주위에서는 산소(묘지) 준비를 미리 해 놓는 것이 좋을 것 같다 하여 지인의 소개로 경기도 포천에 있는 서능공원 묘지 약 30평을 확보하여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이미 지난 72년에 돌아가신 어머니와 합장해 드리기로 했다.
그렇게 꿈에도 그리던 사무관 시험을 준비하려는 필자는 이런 어려운 상황에서는 합격이 어려울 것 같아 아예 시험을 포기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판단했다.
그래도 모처럼 주어진 시간이니 최선을 다해 보자고 하여 정신 없이 책과 씨름하고 또 장례 준비도 열심히 챙겼다.
이렇게 혼자서 북치고 장구치는 이유는 아버지를 모시고 있는 필자 외에는 아무도 도와줄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아내와 나는 최선의 방법으로 역할을 분담했다. 외부 일은 모두 내가 하고 집에서 아버지를 수발하는 일은 모두 아내가 하기로 했다.
홀 시아버지를 모시고 하루에도 대여섯차례씩 엉덩이에 진통제 주사를 직접 놓아주는 일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드디어 시험 일자가 다가와 착잡한 마음으로 시험을 치뤘고, 그 이튿날부터 평상시와 다름없이 맡겨진 일들과 씨름하였다.
그런데 불행히도 그때는 내가 하고자 하는 일들이 잘 안되려고 했던지 모든 것이 나에게 불리하게만 돌아갔다.
그 전까지는 사무관 응시후보로 일단 확정이 되면 그때부터는 후보자의 내신 성적에 관계없이 필기시험 점수 순위로 합격자를 뽑았었는데 유독 그 해부터는 내신 성적 20%와 시험성적 80%만을 합쳐서 합격자를 뽑는다는 것이었다.
한달 후인 12월 하순경에 30명의 시험 합격자가 발표되었는데 예상대로 내 이름은 빠진 것이다.
발표가 난 날 저녁, 비통해 있는 필자에게 총무처 고시 담당자로 근무하고 있던 고등학교 동기로부터 전화가 왔다.
“자네, 진짜 너무 억울하게 탈락됐어. 필기시험 성적은 합격인데 내신 성적에서 떨어져 마지막 합격자에 비해 0.07점이 부족하다네.”
그러면서 내가 소속된 국세청 최고 책임자에게 이런 안타까운 상황을 말씀드려 1명을 더 뽑아달라고 해보라면서 나를 위로해 주었다.
그 때 누워 계셨던 아버지께서 그 전화 내용을 들으시고 당신의 병간호 때문에 시험에 떨어졌다고 생각하셨던지 몹시 미안해 하시는 것 같은 표정을 지으셨다.
“아버지! 이번 아니면 다음에는 되겠지요. 그런 걱정 마시고 꼭 건강을 회복하세요!”
아버지를 가까스로 달래드리고 내방으로 들어와 나는 몹시 울었다.
그런 일이 있었던 몇일후인 84년12월30일 새벽 1시30분경, 참으로 한많은 삶을 사셨던 나의 아버지께서는 69세의 나이로 그만 이 세상을 떠나 어머니 곁으로 가신 것이다.
“아버지! 저는 마지막까지 효도 한번 제대로 못해 드린 불효막심한 아들입니다.”
-매주 水·金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