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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독하기 2025.06.21. (토)

내국세

[연재]'나는 평생 세금쟁이'(22)

‘평생 짝꿍’을 만나다

외로운 세금쟁이에게 ‘평생 짝꿍’ 찾아오다

 

 

 

그렇게 물, 불 안 가리고 일에 흠뻑 빠져 있는 필자에게 평소 친형님 이상으로 존경하는 유일상 선배님께서 어느 날 긴급제안이 왔다.

 

당시 그 선배님께서는 서울시내 세무서에 근무하셨는데 성동구 구의동 명성여고 인근에 있는 아담한 양옥집에 살고 계셨다.

 

당시 그 지역 일대는 신흥 택지개발지역으로 어떤 주택업자가 지어서 내놓은 집을 싸게 매입해서 자녀 2명을 포함한 네 식구가 단란하게 살고 있었는데, 갑자기 강원도 지역으로 전출가게 되었다.

 

부득이 네 식구 모두 이사를 가야 하는데 남들에게 팔자니 아깝고 또 필자의 어려운 형편을 알아서인지는 몰라도 필자가 살고 있는 수유리 집과 맞교환하고 차액 삼백만원은 자기가 은행 대출을 받아 가겠다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당시 필자는 아버지와 새로 모시게 될 어머니, 또 다 큰 두 여동생과 함께 살게 되니 다소 넓은 집이 필요할 것이며, 그렇게 하는 것이 서로에게 유익하다는 것이었다.

 

나 또한 정말 반가운 이야기였다. 그 선배님의 진심 어린 배려로 우리 식구들은 새롭게 지은 양옥집에 살게 되었다.

 

그 때 필자는 갑자기 영세 시민에서 신분이 한 단계 승격된 기분이었다. 평소에도 언제 나도 저렇게 예쁜 집에서 한번 살아보나 했는데 그 꿈이 현실로 이루어진 것 같아서 너무 좋았다.

 

내 기억으로는 당시 그 선배님의 주택 값은 일천여만원짜리로, 내가 살고 있는 집은 700만원짜리로 인정해 준 것으로 기억된다.

 

그러나 실제로 내 집값은 그보다 훨씬 못 미치는 것이다.

 

어쨌든 그 선배님의 크나큰 배려는 지금껏 잊을 수가 없다.

 

무엇보다 필자가 군복무 중일 때 그 선배님의 특별한 배려로 휴가 때마다 ‘세금 알바’로 일하게 해 주신 큰 은혜는 아마도 평생을 두고 다 갚을 길이 없을 것 같다.

 

 

 

 

국민일보가 선정한 2012년도 나눔봉사부문 국민대상 시상식에서 아내 유영혜 석성장학회 이사장과 기념촬영 모습.

 


그 즈음에 아버지께서는 평소에 가까이 지내시던 친구분의 소개로 한 분을 우리 집으로 모시고 오셔서 함께 살게 되었다.

 

그런 데도 아버지께서는 조강지처가 자꾸 생각나시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가끔 다투시기도 했다. 왜냐하면 집을 제대로 꾸리고 나갈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시면서 나에게 직장 일도 중요하지만 이제는 가정을 꾸려 나가야 하지 않겠느냐라고 자주 채근하셨다.

 

또 무엇보다 손주를 낳아 당신에게 안겨 달라는 것이었다.

 

 

 

그러시면서 여기저기에 혼처 자리를 알아보셨다. 어떤 때는 ‘정말 이 사람은 아닌데…’ 할 정도로 내가 싫어하는 사람만을 골라오니….

 

 

 

그래서 당시 아버지와 나는 많이 다투게 되었다. 일생고락을 함께 할 평생의 반려자를 찾는 데도 아버지는 ‘우리가 가난하니까 부잣집 여식이면 됐지’라는 단순한 생각만을 하신 것이었다.

 

그런 데도 한편으로는 저렇게 인간적으로 간절하게 애원하시는 아버지를 생각해서라도 이제는 빨리 짝꿍을 만나야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그 즈음 바로 아래 여동생이 어떤 ‘낭군’을 만나 교제 중인데 빨리 결혼해야겠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시댁이 살고 있는 미국으로 이민을 가겠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내 문제보다 동생을 먼저 출가시키게 되었다.

 

 

 

출가 후에도 당분간 우리와 함께 살고 있는 여동생이 미국으로 건너가기 위해 종로에 있는 영어회화학원을 다니면서 함께 수강하던 한 자매와 친하게 지내고 있었다.

 

어느 날 필자가 살고 있는 집으로 그 친구들을 데리고 온 것이다. 아마도 그 때부터 내 여동생은 무슨 꿍꿍이(?)가 있었던 것 같았다.

 

그 날만큼은 일찍 들어 오라는 동생의 연락을 받고 일찍 집으로 도착을 해 보니 왠 낯선 여성이 함께 우리 집에서 식사를 하고 있었다.

 

처음 보는 순간 평소 내가 그렇게도 꿈꾸던 환상이 현실이 되어 내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예쁘기도 했지만 경상도 사투리를 쓰는데 당시 내 눈에는 그렇게 예뻐 보일 수가 없었다. 더구나 고향도 같은 지역이었다.

 

그 이튿날부터 여동생을 부추겨 그녀에 대해 자세히 알아 보라고 재촉했다.

 

며칠후 동생은 그녀가 1남6녀 중 맏딸이며 경북여고를 거쳐 이대 법대를 졸업하고 가정법률상담소(당시 소장은 작고하신 이태영 박사)에서 근무하고 있다고 귀뜸해 주었다.

 

아버지가 여고 3학년때 갑자기 돌아가시는 바람에 자기가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고 있으며 또 자기 집안 식구들을 잘 챙겨 줄 남편감을 찾고 있다는 말도 덧붙였다.

 

바로 이 여성이다. 그토록 찾아 헤매던 내 평생 짝꿍….

 

그 때부터 그녀의 마음을 얻기 위해 무던히도 노력했다. 그리고 반드시 이 여성을 내 아내로 맞이할 수 있게 해달라고 매일매일 간절하게 기도했다.

 

또 그녀를 직접 만나 지금은 비록 국세청 6급 직원에 불과하지만 앞으로 점점 좋아질 것이니 부디 내 짝꿍이 되어 달라고 졸라대었다.

 

처음에는 별 반응을 보이지 않던 그녀도 몇개월간의 끈질긴 구애작전에 결국 백기를 들고 말았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제 기도에 응답해 주셔서….

 

나중에 알았지만 그녀는 신앙심이 독실하고 또 아버지 같은 느낌이 있는 결혼 상대자를 찾고 있었는데 처음에는 나를 별로라고 생각하고 아예 염두에도 두지 않았는데 차츰 시간이 지날수록 자기도 모르게 호감이 가더라는 것이었다.

 

참고로 아내는 가정법률상담소를 거쳐 나중에는 서울지방검찰청 소송사무를 담당하는 사무관으로 특채되어 잠시 근무하다가 결혼후 지금은 내가 직접 설립한 (재)석성장학회 이사장직을 자원봉사자의 마음으로 잘 섬겨주고 있다.

 

그동안 아내와 사십년 가까이 함께 살아오면서 숱한 갈등과 마찰 속에서도 못난 나를 남편으로 생각하고 평생 세금쟁이의 아내로서 어려운 고비 마다마다를 잘 견뎌 주었으며 무사히 공직을 명예롭게 퇴임할 수 있도록 불평없이 헌신해 주어 진심으로 고맙게 생각한다.

 

또 현재는 나와 함께 사회 곳곳 어려운 이웃들에게 다가가 나눔과 섬김의 사역들을 당당하게 실천해 나가는 나의 진정한 동역자로 살아가고 있어 나는 그 어느 때보다 행복하다.

 

“나의 영원한 짝꿍, 류영혜 이사장!, 그대는 진정 나의 영원한 존재 이유라네.”

 

 -매주 水·金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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