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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국세

[연재]격동기 국세청 30년, 담담히 꺼내본 일기장(30)

  금융거래의 혁명, 금융실명제 시행

 

 
93년8월12일 김영삼 대통령은 대통령의 긴급재정경제명령으로 이날 20시부터 금융실명제를 실시한다고 공표했다. 이날은 실로 역사적인 경제혁명의 날이었다.

 

 

 

이 날을 시작으로 그동안 가명에 의한 금융거래의 관행이 더이상 발붙일 여지가 없어지고 그 대신 주민등록번호에 의한 실명으로만 금융거래를 해야 하는 시대가 된 것이다.

 

금융거래의 실명화로 돈 흐름의 추적이 가능하게 됨으로써 소위 검은돈, 눈 없는 돈이 숨을 구멍이 없어진 것이다.

 

이렇게 되면 중장기적으로는 사업자의 수입금액 양성화에도 크게 기여하리라는 기대가 많았다.

 

이에 따라 금융거래가 실명에 의해 투명해지면 실물거래의 투명성도 높아져야 한다는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나왔고 이를 세정면에서 보면 세금계산서 없는 소위 무자료거래가 없어져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말이었다.

 

그러나 금융실명제가 실시됐다고 해서 광범위하게 형성돼 있는 무자료거래가 바로 없어질 리가 없었다.

 

우리나라의 유통과정에서는 상품을 사는 수요자가 상품을 파는 공급자보다 경제적 우위 소위 갑의 입장에 있기 때문에 사는 자가 세금계산서 받기를 거부하면 파는 자는 부득이 세금계산서 없이 상품을 팔 수 밖에 없었다.

 

이리하여 제조업자에서 도매업자로, 도매업자에서 소매업자로 내려오면서 실로 광범위하게 무자료 거래가 형성돼 왔다.

 

가전제품, 주류, 청량음료, 세제류, 화장품, 의약품, 직물의류, 지류, 건자재 등 헤아릴 수 없는 품목이 무자료로 쏟아져 나와 전국의 대규모 집단상가와 재래시장을 뒤덮고 있는 것이 실상이었다.

 

이와 같이 오래된 유통과정의 관행에서 형성된 무자료 거래를 막는데 금융실명제가 큰 도움이 되리라고 기대하는 것은 무리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스컴에서는 금융실명제를  실시함에 따라 실물거래도 무자료없는 투명한 거래가 이뤄져야 한다는 주장을 유행처럼 게재했고 이에 대하여 무자료 거래를 근절시켜야 할 책임을 지고 있는 국세청의 입장은 참으로 난처했다.

 

상품을 사는 자가 세금계산서를 달라고 요구하는 방향으로 납세환경이 근본적으로 변화되지 않은 상황에서 세무행정력에 의한 무자료 거래 특별조사 또는 유통과정 추적조사는 아무리 노력해도 한계가 있었고 그것도 인력 부족으로 상시 조사가 불가능한 상황하에서는 더욱 그러했다.

 

이러한 상황 인식하에서 우리는 그야말로 고육지책으로 대대적인 무자료거래 추적조사를 주기적으로 실시해 무자료 거래를 발본색원하려는 정부의 의지를 강력하게 표출하지 않을 수 없었다.

 

    

 

 

 

 

93년3월5일 출범한 김영삼 정부는 같은 해 8월12일 오후 8시를 기해 대통령긴급명령으로 금융실명제를 전격 발표했다. 역사적인 ‘경제혁명’이 단행된 것이다. 이 때부터 국세행정의 모든 초점이 금융실명제가 어떻게 하면 빨리 정착 될 수 있을 것인가 에 맞춰졌다. 갑작스럽게 도입된 금융실명제는 모든 경제활동의 근간부터 흔들었다. 국세청은 세정조직을 금융실명제체제로 바꾸는 등 금융실명제가 조속히 착근될 수 있도록 모든 행정력을 집중시켰다. 정부기관은 물론 경제사회단체들도 갑작스런 대 변혁에 당황하면서도 환영하는 분위기가 대세였으며, 설명회나 간담회 등을 통해 금융실명제 대책에 몰두했다. 또 금융실명제는 세제개혁을 자연스럽게 견인했다. 따라서 세제개혁에 관한 정책토론회도 봇물을 이뤘다. 금융실명제가 실시된 지 1주일만에 서울 롯데호텔에서 개최된 정사협(正社協) 주최 ‘금융실명제시대의 경제개혁과 그 방향’이라는 주제의 대토론회 모습(상)과 한국조세연구원이 주최한 세제개혁 토론회 모습. <세정신문DB>  

 


93년~95년 대대적인 무자료거래 추적조사 

 

 

 

 93년 3월에 이미 107개 업체에 대한 조사를 마무리함과 동시에 청량음료, 화장품 등 일부 품목에 있어서는 제조업자와 도매업자를 묶어 거래질서정상화협의회를 결성하여 자율감시조직을  운영하도록 유도했다.

 

우리는 다시 93년 9월 한달 동안 2차로 442개 업체를 선정해 사상 최대 규모의 무자료거래 추적조사에 임하였다.

 

 

 

이번에는 거래질서정상화협의회 결성을 꺼리는 전자제품 취급업체 등이 다수 대상에 포함됐다.

 

우리는 조사 결과를 재경원 국무총리실과 청와대 민정비서실에도 보고했는데 이들 외부기관에서 국세청의 노력을 평가하고 앞으로 지속적인 무자료거래 추적조사가 필요하다는데 공감했다.

 

우리는 이들의 힘을 빌려 7개 지방청에 1개반 10명 단위의 무자료 거래추적조사 전담조직을 상설화 하는 방안을 마련해 총무처 관계국과 수차례 협의를 진행했으나 이 시도는 결국 무산되고 말았다.

 

청와대 민정비서실과 국무총리실 행조실에서는  국세청으로 하여금 무자료거래 근절 종합대책을 마련하도록 계속 요청했다.

 

나는 단기대책과 중장기대책, 그리고 범정부차원의 대책으로 나눠 보고서를 성안한 후 내부결재를 거쳐 외부관계 기관에 제출했다.

 

이 보고후 국무총리실에서는 무자료거래추적조사는 국세청이 맡고 주류 등 수도권 무자료시장의 단속은 경찰과 지자체가 교대로 단속하며, 제조업체의 상품 끼워 팔기 또는 밀어내기식 판매는 공정거래위원회가 담당하도록 교통정리를 해줬다.

 

이에 따라 공정거래위회는 94년 8월부터 그 해 연말까지 주류 제조업체 15개사와 주류 도매상 20여개소, 수퍼 및 연쇄점본부 20곳 등을 대상으로 대대적인 조사에 착수했다. 실로 무자료거래 차단을 위하여 범정부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유통관행의 근본적인 변화가 없는 한 역시 이러한 범정부적인 노력에도 무자료거래의 관행은 여전하였다.

 

우리는 상품을 사는 자가 상품을 파는 자로부터 세금계산서를 달라 하고 요구하는 이른바 범사회적인 납세환경 또는 유통관행의 변화를 유인할 수 있는 새로운 제도를 도입해 시행할 때까지는 큰 실효성은 없지만 조사, 단속을 지속하면서 시대의 변화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계속>-매주 月·木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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