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지사지, 납세자 입장 배려
서부세무서에 부임후 얼마 안 되어 법인세과에서 결재가 올라왔는데 세금계산서 불부합 자료비율이 제일 높은 법인을 지방청에 보고 한다는 것이었다. 지방청에서는 이를 근거로 지방청 조사국의 조사 대상으로 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 법인이 어떤 법인이냐고 했더니 상호는 OO이고 관내 하나 뿐인 수출 상장법인이라고 했다. 나는 보고기일이 늦어지더라도 해당 법인으로부터 직접 소명을 받아 확인후 보고토록 하고 지방청에는 전화로 양해를 구했다.
해당 법인의 소명을 받아보니, 모두 전산처리 착오로 밝혀졌다. 소명과정을 거치지 않았더라면 지방청의 세무조사를 받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이 일이 있고 나서 한참 후에 서장실로 이 법인의 오너 S회장이 찾아와 나는 이미 다 잊어 버리고 있는 이 일을 꺼내면서 자칫 어려운 일을 당할 뻔했는데 정말 감사하다고 말하였다.
나는 납세자 입장에서 사소한 일이라도 역지사지(易地思之)한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 다시 한번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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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년 3월에 취임한 서영택 국세청장은 취임하자 마자 부동산 투기 억제에 주력했다. 87년 대선때 여야가 남발한 대선공약들은 전국적인 부동산투기를 몰고 왔기 때문이다. 서 청장은 아침저녁으로 부동산 투기 현장을 점검했고 기회가 될 때마다 간부회의를 주재, 간부들을 독려했다.<서영택 청장(중앙)을 중심으로 왼쪽으로 이연희 자료관리관, 서영태 국제조세관리관(1급), 오른쪽 추경석 차장, 조중형 서울청장이 보인다> <세정신문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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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무조사, 현장실사만이 능사 아니다
89년은 88서울올림픽이 끝난 바로 다음해로 나라 전체가 경기 상승 국면에 있었고 부동산 부분은 과열 상태에 있었다.
골프붐도 일어 여기저기 골프연습장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는데, 강남에 이어 강북지역에서는 서부세무서 관할에 이름있는 골프연습장이 많았다.
나는 지역 특성에 맞는 세원관리 차원에서 골프연습장의 신고 수준을 제고시키고자 마음먹고 그동안 이들 사업장의 신고 상황을 확인한 바 관내에서 가장 큰 연희동 XX골프연습장이 후순위에 있었다. 내용을 알아보니 당시 고위관직에 있었던 그 업체 실제 오너의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 제대로 과세가 되지 않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었다.
나는 세무서 차원에서 이를 시정하기가 여간 어렵다고 판단하고 모든 기본사항을 철저히 파악하고 추정 수입금액을 추계해 본청에 탈세정보 자료로 제출케 하였다.
그로부터 몇개월이 지난 후 지방청에서 서울시내에 랭킹에 드는 대형 골프연습장들을 일제히 기획조사하는 계획을 세워 하달했는데 이 골프연습장도 들어 있었다. 지방청에서 조사해 줄 것을 기대했는데, 결국 세무서로 부메랑이 되어 돌아왔다.
강남의 몇개 세무서는 즉시 조사 착수를 하였으나 나는 조사 착수를 계속 유보하면서 이 일을 어떻게 추진해야 할지 오래 고민했다.
조사를 지휘해야 할 부가가치세과장은 병가로 오래 자리를 비우고 있고, 현장에 나가 조사를 해본들 과거의 장부 기록을 확보하지 못하면 자칫 조사다운 조사를 못하고 철수하고 마는 것이 아닐까 염려가 되기도 하였다.
나는 고심 끝에 현장조사를 생략하고 직접 당시 某공직의 기관장으로 있는 오너를 직접 찾아가 뵙고 협조해 줄 것을 당부했다.
그의 사무실에 들어서자 그는 처음엔 나를 달갑지 않게 맞이했으나 내가 준비한 분석 자료를 한장 한장 설명해 나가자 긴장한 기색이 완연했다.
나는 현장조사 할 경우 매스컴에 알려지면 곤란한 일이니 현장조사 없이 내가 제시한 분석 자료를 근거로 이를 확인하고 동의해 주면 서면조사로 이 일을 마무리하자고 제의했는데, 조건없이 이를 수락하였다.
바로 그 다음날 아침 본인을 대리하는 현장관리인과 함께 세무서에 나와 서면으로 사실 확인 절차를 마무리 하였다.
서울청 관내 골프연습장 기획조사 중에서 서부가 제일 늦게 착수하였으나 제일 먼저 마무리하고 그것도 가장 좋은 실적을 거두었다.
나는 조사 결과를 정리해 지방청장(당시 조중형청장)께 보고했고, 지방청장은 본청장(당시 서영택청장)께 보고했다. 이 사안에 대한 과세방식은 일종의 추계과세방식을 취하였기 때문에 납세자와 충분히 대화하였고 협의하는 과정이 필요했다. 당시 본청 서영태 국제조세관리관(1급)께서 중간에서 많은 도움을 주었다.
이 일은 조사에서부터 최종 고지되어 관련세금의 납부로 종결되기까지 약 4개월의 시간이 소요되었는데 그동안 나는 지방청장과 본청 관계 실·국장에게 수시로 전화보고를 하면서 결국 이 일을 무리없이 잘 마무리할 수 있었다.
‘돈 받은 자는 돌려주어라’ 훈시
서부세무서장 시절 나는 매월 1일에 전 직원 정례조회를 열고 직원들에게 정신적으로 교훈이 되고 도전이 되는 말씀을 전하곤 했다.
89년9월1일 업무노트에 메모되어 있는 서장 훈화 제목은 ‘인생과 일’이고 내용의 소제목은 ‘무슨 일이나 난 해낼 수 있다고 적극적으로 사고하라, 일의 우선순위를 정하고 중요한 일부터 먼저 하라, 추진목표를 정하라, 원칙에 충실하라, 정성을 다하라, 보상을 염두에 두지 마라, 유종의 미, 곧 끝마무리를 철저히 하라, 감사하라’ 라고 요약해 놓고 있다.
나는 이런 식으로 직원들에게 정신교육을 실시했다.
어느 날 조회때 나는 ‘세무공무원은 결코 굶어 죽지 않는다, 억지로 돈을 쫓아가지 마라, 그리고 양심에 꺼리는 돈을 받았을 땐 곧 돌려주는 경험을 가져보라. 얼마나 자유로운지 알 것이다’라는 요지로 전 직원들에게 훈시의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이로부터 며칠 후 서부경찰서에서 출입하는 정보과 형사가 찾아와 서장님은 어떻게 그렇게 직원들 앞에서 대담하게 말씀 할 수 있느냐고 하며 놀라워했다.
나는 한 지역을 관할하는 기관장, 특히 세무서장은 수많은 직원들과 납세자들 앞에 일거수일투족이 다 노출되어 있다고 생각하고 매사 언행일치와 솔선수범의 자세를 견지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본을 보이려고 늘 명심하였다.
<계속>-매주 月·木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