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이 기피하는 자리가 곧 기회다
당시만 해도 국세청에서 행정관리담당관실은 일이 적은 한가한 부서로 알려져 왔다. 그러나 나에겐 너무 일이 많았다.
조직의 인력을 증원하는 것은 일선의 인력난을 해소할 뿐만 아니라 많은 승진 자리를 만들어 조직에 활력을 불어 넣는 기회가 되기 때문에 청장, 차장께서 이 일에 무척 신경을 썼다.
이에 따라 내가 매일 잠시도 소홀히 할 수 없는 일이 바로 조직 및 인력을 보강하는 일이었고, 이외에도 내부적으로 새롭게 개선해야 할 일들이 산재해 있었다.
일을 안하려고 하면 그냥 넘어가도 누가 무어라 하지 않겠지만 나의 눈에는 그대로 덮어두고 갈 수가 없었다.
국세청 조직재편(안) 마련, 세정민관협의회 구성 및 운영, 심사분석평가제도 개선, 성실납세자 우대관리제도 개선, 공무원 제안제도 활성화, 공무 국외여행 개선, 세무서 관할구역 조정, 세무회 운영 개선, 일본의 국세행정개요 발간, 사법연수생 국세청 실무 수습 시행 등 그동안 묻혀 있던 크고 작은 일들을 찾아내 하나하나 새롭게 정리하고 개선해 나갔다.
그동안 타의에 의하여 본청에 불려와 행정관리담당관실에서 어려운 일들을 함께 해온 신창호, 김재천(후에 대전청장 역임) 사무관 그리고, 김정남 조사관 등에게 감사한 마음을 잊을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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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년 12월 미 국세청(IRS) 방문시 Washington, D.C, IRS 현관에서 왼쪽부터 필자, 정회상·심준보 사무관(김영주 조사관은 카메라를 누르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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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청장, 미·일의 세무조사행정에 큰 관심
서영택 청장께서는 88년 연말에 미국과 일본의 세무조사와 세무사찰제도를 현지 출장을 가서 보고, 그 결과를 연구보고서로 제출하도록 했다. 출국에 앞서서 우선 질문사항을 모두 체크리스트로 작성하고, 출장후 일을 덜기 위하여 미리 연구보고서 초안을 작성하고 출발하였다.
12월3일부터 17일까지 2주간, 조사국 심준보 사무관, 법인세과 정회상 사무관, 김영주 조사관 등 세 사람이 함께 동행하였다.
2주간의 여행에서 돌아와 미국과 일본 국세청의 세무조사 행정에 관하여 조사 대상 선정방식, 조사의 유형, 조사주기, 조사기술, 요원채용 및 교육, 근무기강 등을 정리해 차장, 청장께 보고하였다.
서영택 청장께서는 취임 초부터 우리나라 일선 세무서에 조사업무만을 전담하는 명실상부한 조사과 조직을 만들려고 했는데, 부동산 투기 열풍을 잡느라 일선 조직의 개편 작업은 보류할 수밖에 없었으나 마음 속엔 그 생각을 계속 품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89년 3월 어느 날 청장실 결재시 나는 청장께 ‘허락하시면 이번 인사이동때 서울시내 세무서로 나갔으면 합니다. 이 자리에 1년 더 있게 되면 본․지방청에서 4년이나 됩니다’라고 말씀드렸더니 청장께서는 ‘그렇게 하지’라며 약속해 주었다.
그로부터 며칠 후 추경석 차장께서 나를 불러 부천서장으로 가겠느냐고 물었다. 나는 경인지역은 생각해 본적이 없었기 때문에 그냥 서울시내면 어디라도 좋겠다고 대답했다.
당시 서정원(徐廷元) 총무과장(후에 경인청장 역임)은 행정관리담당관실에서 고생하는 내 모습을 지켜보고 여러모로 어려울 때 도움을 주었고 이번 인사 때도 나를 배려하여 진언했던 것이다.
그러나 나는 사람들이 가고 싶어 하는 자리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경력관리를 위해 어디서라도 일선 서장을 거친 후에는 본청 지휘탑에 들어와 일할 준비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마음속으로 이렇게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막상 인사봉투 뚜껑을 열고 보니 서울시내 세무서 중에서 선호도가 제일 낮은 곳으로 발령이 나서 조금은 서운한 마음을 달래야 했다.
5. 서부세무서장 시절
89년4월4일 나는 서울 은평구에 위치한 서부세무서장으로 부임하였다.
서부세무서는 은평구 전역과 서대문구 연희동 등 일부 지역을 관할하였다. 인구밀집 지역이다 보니 소득세 납세자가 많고, 양도소득세 등 재산제세 자료가 많이 발생한 반면 법인사업자는 대부분 소규모이고, 상장 법인은 1개 업체 뿐이었다.
매일 오전 9시에는 총무과장, 부가가치세과장, 소득세과장, 재산세과장, 법인세과장이 서장실에서 티 타임을 갖고 그날그날의 현안업무를 의논하고, 서장이 도와야 할 사항이 무엇인지를 파악하고 지원하였다.
서장의 일상 업무 중에서 어디를 가나 마음에 부담이 되는 일은 역시 체납세금 정리였다. 매일 저녁때는 그 날의 체납세금 정리 상황을 직원 한 사람 한 사람을 상대로 복명을 받는 것이 관례가 되었다.
이 일은 무엇보다 직원들에게 스트레스를 주었지만 서장으로선 최단시일안에 직원들의 성품과 자질, 능력을 파악할 수 있는 장점도 있었다. 어떤 측면에서는 담당 과장보다 내가 특정 직원에 대하여 여러 면을 더 종합적으로 잘 파악하고 있는 경우도 있었다.
나는 체납 복명을 받을 때 고생하는 직원들에게 야단치거나 따지지 않고 늘 열심히 하자고 하며 여유있게 대하였다. 그날 복명할 실적이 없는 직원은 마음속으로 얼마나 더 긴장하고 있는지를 헤아려 보면서 세무공무원으로 산다는 것이 얼마나 고달픈 일인가 생각할 때가 한두번이 아니었다.
세금받는 일이 이렇게도 어려운데 세금을 쓰는 기관에서 너무 헤프게 예산 쓰는 것을 볼 때면 속으로 얼마나 화가 나는지 한두번이 아니었다.
나의 눈에는 작은 것에서부터 큰 것에 이르기까지 정말로 많은 부분에서 예산을 절약할 수 있는 길이 보였다. 특히 전국 도․시․군․구 등 지방자치단체에서의 예산 낭비 사례는 너무도 많았다.
<계속>-매주 月·木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