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믿고 싶지는 않지만, 영국의 조세정의 네트워크(www.taxjustice.net)에 따르면 우리나라 부자가 1970년도부터 2010년까지 조세피난처로 몰래 빼낸 돈이 자그마치 7,790억달러(888조원)이라고 한다. 이게 사실이라면 아니 10%만이라도 맞는다면 이것은 보통 문제가 아니다. 국내에서 성실하게 세금을 내고 살아가는 사람들과의 형평성 운운은 차라리 사치스러운 불평이다. 더 심각한 이유는 국내 세법이 속인주의 즉, 국내소득과 국외소득을 합쳐서 국내에서 과세하는 시스템인데, 이게 다 무용지물이기 때문이다. 세법의 그물망만 덩그러니 있고 고기는 숭숭 다 빠져 나간다면 이게 무슨 소용이 있을까.
이와 같은 탈세형태에 대해 과세관청이 갖고 있는 대응방안 중의 하나가 조세조약상 '정보교환규정(exchange of information)'을 이용해 탈세자의 자금흐름을 확보하고 이를 근거로 과세하는 것이다. 그러나 전 세계 200여개 국가 중 우리나라가 조세조약을 체결하고 있는 나라가 77개 국가에 불과하고, 조세정보교환협정을 체결하고 있는 지역이나 국가가 14개 국가 정도에 불과하다. 즉, 전 세계 절반 이상의 국가나 지역의 조세정보를 우리나라 과세관청이 제대로 얻을 수 없는 실정이다.
2. 한편, 최근 개정된 한국과 스위스의 조세조약을 보면, 한국정부가 탈세를 입증하고 동시에 계좌번호를 알려줄 경우에 한해서 2011년1월1일 이후 해당 탈세자의 스위스은행 계좌정보를 알려준다고 하고 있다. 다시 말해 무턱대고 다 알려주는 것이 아니고 납세자의 탈세혐의를 우리나라 과세관청이 입증해야 하는 것이다. 스위스 입장에서 보면 당연한 요구일 것이다. 스위스 산업에서 금융업이 차지하고 있는 비중이 20%가 넘는다고 한다. 따라서 외국에서 자료를 요구한다고 해서 무작정 다 준다고 하면 스위스 금융산업이 망가지는 것은 불문가지일 것이다.
그러나 외국의 탈세범이 자국의 은행에 예금을 하고 있다면, 설사 자국의 이익과 외국의 이익이 충돌하게 될 경우라도, 국제법의 기본정신에 따라서 정보교환이 이뤄지는 것은 상식이다. 왜냐면 탈세범은 자본주의 및 시장경제주의가 번창하는 데 암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런 차원에서 스위스는 미국과 지난 10여년간에 걸친 협상 결과 2010년부터 탈세범에 한해 은행의 고객정보를 미국에 건네주기 시작했고 이어 다른 나라와 조세조약 개정작업을 하고 있다. 우리나라와 조세조약 개정도 이와 같은 연장선 상에 있다고 본다. 그런데 눈치 빠른 부자들은 이미 스위스에서 조세조약이나 정보교환협정이 체결되지 않은 지역으로 돈을 옮겼다고 한다. 대표적인 지역이 홍콩이다.
3. 어떻게 이들의 탈세행위에 대해 대처할 것인가? 이런 행태에 이골이 났던 프랑스의 대응방안이 보다 효과적이라고 생각해 소개한다. 요점은 이렇다. 프랑스의 거주자나 법인이 조세피난처에 있는 기업이나 은행과 거래를 한다면, 그 거래에 정당함을 납세자가 입증하도록 하고 있다. 만일 입증하지 못한다면, 해당 경비를 부인하고 세법상 추계로 과세하는 것이다. 따라서 납세자는 선택을 해야 한다. 조세피난처와 거래 내역을 과세당국에 스스로 제출하든지 아니면 추계과세를 당하든지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것이다.
이 제도를 국내에 도입할 필요가 있다. 그 이유는 과세관청이 납세자의 해외 탈세정보를 모두 확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주장을 하면 납세자의 절세권에 대한 도전이라든지 성실신고원칙에 위배될 수 있다는 반론이 있을 것이다. 일부는 동의하지만, 그러나 이들 원칙은 성실한 납세자에게 적용되는 규정이지, 불성실하고 탈세한 납세자에게까지 적용될 이유는 없다고 본다.
4. 그리고 이와 같은 입법례는 현행 세법체계에도 이미 도입돼 운용되고 있다. 이른바 Tax Treaty override 규정이다. 법인세법 제98조의5에서 규정하고 있는 원천징수 특례절차가 바로 그 좋은 예이다. 조세조약이 국내 세법보다 우선 적용되는 특별법임에도 불구하고, 국내 세법이 조세조약보다 우선 적용되는 특례규정을 적용하고 있다. 말레이시아 라부안( Labuhan) 지역 소재 투자펀드가 한국에서 유가증권 양도소득이 있는 경우, 조세조약상 한국에서 비과세됨에도 불구하고 국내 세법에 따라 일단 과세를 하고, 추후 납세자가 라부안 지역의 거주자임을 입증하면 경정청구를 통해서 이미 납부한 세액을 돌려받도록 규정하고 있다.
그리고 탈세 목적으로 조세피난처에 이들의 돈을 숨겨준데 일조한 변호사나 회계사 등 조력자들에 대해서도 처벌을 해야 한다. 비교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일본 법원은 음주운전 사고 차량에 동승했던 자에 대해서도 '위험운전 치사상죄의 방조범'이라고 해 유죄를 인정하고 있다. 우리나라 법원도 의사가 환자의 치료를 중단하면 사망할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가족의 요청에 따라 퇴원을 허용했다면 '살인방조죄'에 해당한다고 판결하고 있다. 탈세가 뻔히 보이는 상황에서 이들의 조세피난처로 돈을 이전시키는 것에 관여한 자는 '탈세방조죄'에 해당될 것이다. 우리나라 조세범처벌법 제9조제2항을 장롱 속의 운전면허장 취급을 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조세피난처와 거래한 자에 대한 입증책임 부여 및 탈세방조죄의 적용이야말로 조세조약상 정보교환규정보다 훨씬 효과적인 탈세방지대책이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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