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0년 동안 비밀 전통을 유지해온 스위스 은행이 최근 미국 국세청에 고객정보를 제공하기로 한데 이어 탈세자들의 천국으로 불리는 유럽의 소국 리히텐슈타인도 탈세 혐의자에 대한 정보를 독일에 제공하는 등 조세피난처들이 하나 둘씩 무장해제 당하고 있다.
이는 금융위기 이후 국제사회가 탈세에 대한 규제강화에 나서고 있기 때문으로, 이를 계기로 조세피난처로 이용돼온 다른 은행들도 비밀 유지 관행을 깨고 굳게 닫은 비밀 금고가 열릴 전망이다.
독일과 리히텐슈타인은 지난 2일 탈세 혐의자에 대한 정보 제공을 위한 협정에 서명, 독일은 내년부터 재산을 리히텐슈타인에 은닉한 혐의가 있는 탈세 혐의자의 세부사항을 요청할 수 있게 됐다.
리히텐슈타인은 지금까지 탈세의 뚜렷한 증거가 있는 경우에만 관련 정보를 제공해 왔다.
이에 앞서 스위스 정부는 자국의 UBS은행에 계좌를 보유하고 있는 4천450명의 미국인 명단을 미국 정부에 넘겨주기로 합의했었다.
스위스 정부는 또 프랑스 정부에 고객정보를 건넸다. 프랑스 정부는 이에 따라 탈세를 위해 30억유로(약 5조3천562억원) 규모의 자산을 스위스 은행의 계좌에 은닉해온 의혹이 있는 프랑스인 탈세 혐의자 3천명에 관한 정보를 확보하기도 했다.
이밖에 이탈리아, 캐나다 등도 스위스 은행들에 탈세혐의가 있는 자국인 고객의 계좌 정보를 넘겨달라고 요구하고 나선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OECD, 조세피난처 압박 강화
조세피난처들이 하나 둘씩 무장해제하는 이유는 금융위기 이후 국제사회가 탈세에 대한 규제강화에 나서고 있기 때문이다.
국제협력개발기구(OECD)는 조세피난처를 압박하고 나서는 한편 탈세 감시기구 설립도 추진하며, 국제 탈세 행위를 막기 위한 움직임을 강화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OECD의 압박으로 조세피난처들은 하나둘씩 조세정보 공개를 하는 모습이다.
유명 조세피난처인 버진아일랜드와 케이만군도도 OECD의 압박으로 조세 정보 공개를 이행키로 했다.
OECD는 아울러 탈세 감시기구 설립을 위해 84개국이 참여하고 있는 조세 정보 공유 관련 포럼을 국제 공식기구로 격상시키는 방안을 검토 중인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OECD는 이 기구를 통해 회원국 간 탈세 감시 관련 공조를 강화, 각국의 조세정보 공유협정 이행 상황을 점검하는 등 조세피난처를 더욱 압박할 계획인 것으로 알려졌다.
국세청도 해외 도피성 자산 정밀조사 착수
그럼 우리나라의 상황은 어떠할까. 국세청은 이르면 이달 세계조세피난처정보센터(JITSIC)에 직원을 파견, 조세피난처를 통한 내국인들의 재산은닉 추적과 과세에 대한 본격적인 분석에 돌입할 예정인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JITSIC는 미국, 영국, 일본, 캐나다, 호주 등 5개국이 회원국 간 조세피난처 자금거래 정보를 교환하기 위해 만든 협의체로 우리나라는 올해 초 가입했다.
국세청이 조세피난처 분석에 돌입한 이유는 우리나라도 최근 해외투자를 가장해 회사 자금을 해외로 빼돌린 뒤 가족 명의로 현지 부동산 등을 구입하는 등 국제거래를 이용한 탈세가 늘어나고 있기 때문.
국세청은 이에 국제공조를 강화하고 금융감독원 등 유관기관과 협력해 탈세혐의를 조사할 계획으로, 금융당국과 민간 금융기관의 자료를 바탕으로 '국제거래세원 통합분석시비스' 구축할 계획인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백용호 신임 국세청장도 조세피난처를 이용한 탈세 문제해결에 강한 의지를 보이고 있다.
백 청장은 지난달 14일 '전국세무관서장회의'에서 해외투자를 가장하거나 조세피난처를 이용한 재산 해외은닉에 대한 분석 활동을 강화하고 허위세금계산서 수취자에 대한 세무조사 및 범칙처분도 강화하라고 주문한 바 있다.
풍문으로 떠돌던 각종 괴자금 실체 드러나나
철저하게 보안유지를 해왔던 조세피난처가 미국과 유럽 등 강대국들의 전방위 압박에 못 이겨 고객 정보를 속속 공개하고 있는 가운데, 국세청도 조세피난처를 이용한 재산 해외은닉에 대해 분석활동에 나섬에 따라 ‘지구촌 비밀계좌시대’가 막을 내릴 조짐을 보이고 있다.
이에 따라 풍문으로만 떠돌던 정·재계 전·현직 거물들의 은닉재산이 베일을 벗을 가능성이 높다.
지금까지 은닉한 비자금과 탈세로 빼돌린 괴자금이 스위스 은행 등 해외 비밀계좌에 숨겨져 있다는 소문이 적지 않았다.
세계 조세피난처는 어디?
한편, 조세피난처는 코스타리카와 말레이시아, 필리핀, 우루과이 등 블랙리스트 국가와 국제기준을 지키지 않고 있으나 앞으로 지키겠다고 약속한 회색국가군으로 분류되고 있다.
OECD가 최근 발표한 세수 평가보고서에 따르면 필리핀, 말레이시아, 코스타리카, 우루과이 등 4개국이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세수 기준의 이행을 거부함으로써 블랙리스트에 올랐다.
그 외 스위스, 룩셈부르크, 벨기에 등 국제기준을 지키지는 않으나 향후 지키기로 약속한 38개 국가가 그레이리스트(greylist)에 올랐으며, 국제 세수 기준을 이행하는 40개 국가(지역)가 화이트리스트에 올랐다.
'조세 피난처'는 금융정보와 세수체제가 투명하지 않고 세율이 매우 낮으며 심지어는 세금을 면제해 기타 국가의 기업, 조직, 개인의 탈세에 편의를 제공하고 국제금융시스템의 안정을 저해하는 등 여러 문제들을 야기한다는 게 OECD의 설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