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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말때의 갑부(甲富=첫째가는 부자) 민영휘(閔泳徽)公에 관한 이야기.
민공(閔公)은 당시 국내(國內) 굴지(屈指)의 세도가문(勢道家門)으로 오랫동안 높은 관직(官職)에 있으면서 가렴(苛斂=세금과 金穀을 과다 징수함)으로 몇만석의 재산을 모았지만 그 돈의 일부를 쾌척(快擲)해 낙후(落後)된 민족교육(民族敎育)을 위해 휘문의숙(徽文義塾=휘문고보의 前身)을 세운 것으로 유명하다.
이때 평북(平北=평안북도) 숙천(肅川) 사람인 이갑(李甲)의 선대(先代)가 이름난 부호(富豪)였는데 민공이 감사(監司=지방장관)로 있을 때, 비위(非違)가 드러나 막대한 재산을 수탈(收奪)당했던 것이다.
이갑(李甲)이 커서 일본 육군 사관학교(士官學校)를 졸업하고 일본 장교(將校)복장 차림으로 고국에 돌아와 민영휘공을 찾아가 '권총'을 들이대고 담판한 끝에 빼앗긴 재산을 돌려받아 그 돈으로 서울에 오성학교(五星學校)를 세웠다.
그런데 그 학교의 위치를 일부러 민영휘공 저택(邸宅)이 내려다 보이는 장소를 골라 지었으니 이갑의 그 오기(傲氣)를 알만하고, 그것을 알게 된 민공의 분한(忿恨=노엽고 분함)은 또한 어찌했을까?
그러나 민영휘 대감은 범상(凡常)한 인물이 아니었다. 얼마후 이갑(李甲)이 배일운동(排日運動=일본을 배척하는 운동)을 하다가 일본(日本) 헌병대(憲兵隊)에 붙들리는 몸이 됐다.
그리고 이갑이 민영휘공에게서 거금(巨金)을 강탈했다는 사실을 탐지(探知)하고 이갑을 파렴치(破廉恥)한 '강도범'으로 몰기 위해 민공을 찾아가서 "대감, 이갑이가 권총으로 공갈해서 거금을 강도질 해갔다지요. 댁에서?"하고 물었다. 이실직고(以實直告=사실대로 고함) 아니, 그 이상의 대답을 기대하고 묻는 말이었다. 그런게 민공의 입에서는 뜻밖의 응답이 나왔다.
"아니, 내가 그깟 젊은 놈이 권총을 들이댄다고 그것이 두려워서 돈 뺏길 사람이요? 그 선친에게 빌린 빚 갚은 거지"하고 긴 연관(煙管=담뱃대)에서 하얀 연기를 시원스레 내뿜더라는 것이다.
이래서 왜놈 헌병은 할말을 잃었고 이갑은 얼마후 민공(閔公)의 주선(周旋=도움)으로 풀려났다.
왜(倭)의 착취로 민족자본(民族資本)이 고갈(枯渴)된 그 당시로서는 왜정의 압제(壓制)의 주박(呪縛=저주스런 묶임)을 늦추고 민족사회를 위한 사업(교육 등)을 비리(非理)로 모은 그런 돈으로 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 양해(諒解)는 안될 망정 동정(同情)은 간다. 그 유명한 이용익(李容翊) 선생의 보성고보(普成高普)도 그렇고, 왕실(王室)에서 나온 돈으로 세운 사학(私學)이 그런 범주(範疇)에 속할지도 모른다.
비록 나쁘게 모은 돈일망정 영세민에 대한 복지지원(福祉支援) 등 좋은 데에 쓰면 그 죄는 용서될 것인데, 요즘 대형 부정축재자(不正蓄財者)가 많다고 들리는데 불구사심(佛口蛇心=말은 부처님 같고 마음은 뱀처럼 간악함)이니 '훔쳐서 꿔간 돈 받아낼 사람이 없어서' 그런지 혹은 법(法)이 자폐증(自閉症=모든 일에 관심이 없고 말을 않는 병)을 앓고 힘이 없어 그런지 수많은 피의(被疑) 정계인(政界人)들이 연이어 방면(放免)되는 등 제모습을 볼 수가 없으니…. 할일 많이 두고 새벽에 첨두수(簽頭水=처마끝의 물방울)를 보는 것처럼 심란(心亂)하기만 하다.
※제 二話는 다음으로 미룸